배너

2024.11.01 (금)

  • 흐림동두천 14.1℃
  • 흐림강릉 15.0℃
  • 흐림서울 16.0℃
  • 흐림대전 13.5℃
  • 대구 13.9℃
  • 울산 14.3℃
  • 광주 14.1℃
  • 부산 15.0℃
  • 흐림고창 13.5℃
  • 제주 18.9℃
  • 흐림강화 13.0℃
  • 흐림보은 12.8℃
  • 흐림금산 13.8℃
  • 흐림강진군 15.6℃
  • 흐림경주시 14.3℃
  • 흐림거제 14.5℃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세계 석학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작가가 차린 <다윈의 식탁>에 앉아 통해 딱딱하고 공격적인 느낌의 ‘논쟁’이 아니라, 진실하고 중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식탁(table)’ 한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토론이라는 것을 사전에 나온 것처럼 ‘의견을 교환하고 논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막상 해보려 하면 남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일선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매일 토론을 벌여야 하는 선생님들의 일과를 생각하니 괜히 제 골치가 지끈거리는군요.
그러나 그렇게 골치 아픈 토론도 제 일이 아니라면 조금은 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MBC 100분 토론이 심야에 방송됨에도 평균 4%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걸로 봐서는 저와 같은 즐거움을 함께하시는 분들이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여기서 재밌는 토론 구경거리를 하나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다윈의 식탁>(장대익 지음. 김영사)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토론에는 굴드와 도킨스를 비롯한 약 30명의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석해있습니다. 이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진화론에 대해 7일간 벌이는 치열한 토론. ‘저런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게 재밌다니? 그것도 주제가 어려워 보이는 진화론인데?’하고 벌써 발을 빼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발견한 이 토론의 볼거리는 어느 팀이 과학적으로 승리하느냐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서로 빈틈없는 논리로 쉴 새 없이 머리 아픈 이야기를 쏟아낼 것만 같은 이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 때론 인신공격을 하고 농을 던지기도 하는 모습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더구나 작가가 중간 중간 참석자들의 개인정보를 흘려주기까지 하니 그 재미를 즐기는 데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춰진 셈입니다.
저도 사실은 자연과학이라는 것과 10년 넘게 척을 지고 살아온 터라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내려놓을 생각부터 했습니다만…. 실제 <다윈의 식탁>에 함께 하고 있는 학자 중에는 촘스키와 같은 언어학자도 있고, 자연과학인지 인문과학인지 헷갈리는 생물철학자들도 여럿 있으니 이 책을 단순히 자연과학서로 표현하는 것도 맞지 않는 표현일 것입니다.

한편 팩션(faction)으로 구성된 이 토론을 마련한 장대익 교수(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는 ‘논쟁’이라는 단어 대신에 ‘식탁하다(tablize)’라는 조어를 제안했습니다.

식탁은 영어로 table이다. 밥 먹는 식탁, 커피 마시는 탁자, 회의하는 탁자, 다 테이블이다. 이 모든 테이블의 공통점은, 중요한 무엇인가를 교환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가령,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을 때 식탁을 찾는다. 그리고 식탁에 앉은 우리는 이내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만난 사람들이 된다.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으면서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따뜻한 얘기가 아니라 논쟁이 붙을 때에도 식탁에서는 진실만이 반찬이다. 그래서 식탁은 늘 생기가 넘친다. 나는 아직 식탁보다 더 좋은 커뮤니케이션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중략)… ‘논쟁’이라는 다소 딱딱하고 공격적인 용어 대신에 ‘식탁’이라는 정겹고도 생생한 용어를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윈의 식탁> 226페이지)

이 부분을 보면 작가는 정말로 누군가와 진실하고 중요한 정보를 교환하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쓴 이유도 진화론이라는 주제를 두고 독자 여러분과 ‘식탁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 책이 담고 있는 중요한 지식(진화론)이나 세계적인 석학들의 과학적인 논쟁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들의 모습을 즐기라고 말한 것에 작가가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토론’이니 ‘논쟁’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즐겨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평상시 굴드가 르원틴이 누리는 학생들의 인기를 질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굴드와 르원틴이 에드워드 윌슨의 노련함에 ‘당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도, 어떤 청중이 도킨스에게 “당신은 사탄이야!”하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도 그냥 있는 그대로 즐겨보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차려놓고 진화론의 후예들이 벌이고 있는 식탁에 함께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얼마든지 작가가 열망하는 다윈의 식탁을 함께 즐기실 수도 있고, 그러한 식탁을 차리는 법을 배우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