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 책의 저자 벨 훅스는 책의 앞머리에서부터 마구 경계를 긋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 영문학 교수 등의 단어를 사용해 자신의 위치와 경계를 확실히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숨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조차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벨 훅스가 책의 앞머리에서 경계를 치는 순간 제 마음에도 경계가 그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저의 경제적 상황, 성별, 인종, 학벌 등을 고려한 나의 사회적 위치가 그려졌습니다. 경계를 긋는다는 것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놓이든 그 자체로 기분이 좋지 않은 작업입니다. 결국 인간은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분이 개운치 않은 경계 긋기는, 겉으로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평소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작업입니다.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어린 학생을 보고서 그냥 지나치는 어른이 있다면, 그 순간 그 어른은 그 학생과 자기 사이에 경계를 그은 셈입니다. 불편한 진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경계 긋기는 이런 특정한 일이 아니더라도 매 순간 무의식중에도 이뤄집니다.
경계 긋기를 마친 벨 훅스는 이제 경계를 넘을 것을 요구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페미니스트인 자신이 성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브라질의 교육사상가 파울로 프레이리를 어떻게 멘토처럼 여길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벨 훅스는 프레이리가 말하는 교육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비록 프레이리의 성차별적 언어 사용에 대해 자기 내면에서 수많은 갈등을 하고 때론 프레이리에게 직접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그는 프레이리가 말하는 실천적인 교육과 껄끄러운 질문도 개의치 않고 받아주는 모습에 공감하며 자신이 프레이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노라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와 성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프레이리 사이에는 명백한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벨 훅스와 프레이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비록 경계는 무너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둘은 경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같음을 찾는 것’ 이것이 벨 훅스가 말하는 경계를 넘는 법입니다.
벨 훅스는 학교에서 이러한 ‘경계 넘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학교는 낙원이 아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은 낙원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이다. 교실은 그 자체로 한계가 많지만, 가능성을 지닌 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가능성의 장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으려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동료에게 우리가 경계를 넘어가려 할 때 겪는 현실에 맞서게 해줄 개방된 사고와 마음을 가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이 자유 실천으로서의 교육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어쩌면 너무나 식상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지켜지고 있지는 않지만 개방적이고 실천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변하라. 변하지 않으면 오늘날의 경쟁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무너뜨려라. 변하기 위해선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누구나 한 번쯤 듣거나 읽어봤을 말입니다. 들어본 사람만 많은 게 아니라 이 말을 해 본 사람도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다지 실천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세계는 성차별, 빈부차, 인종갈등, 종교갈등에 몸살을 앓고 있으며, 얼핏 보기에도 무너뜨리기에는 경계가 너무 많고 단단해 보입니다. 오히려 그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노력에서 받는 고통이 경계에서 받는 고통보다 더 크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계를 넘으라는 벨 훅스의 말이 새롭게 들립니다. 물론 그의 말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를 읽고 ‘경계 넘기’와 ‘경계 무너뜨리기’ 사이에 경계를 긋는 법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