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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는 사슴을 닮은 사람들이 있다

+ 아기사슴 섬
강화도에 이어 이제 남해의 작은 섬 소록도를 찾아갑니다. 저로서는 세 번째 소록도 방문입니다. 소록도를 향해 달리고 있는 제 차에는 저 말고 두 사람이 더 타고 있습니다. 모두 저보다 더 소록도를 잘 아는 사람들일 듯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내게 말을 걸지는 않고 일방적으로 내게 이야기하려고만 합니다. 한 사람은 한하운이란 이름을 가졌고 다른 사람은 이청준이란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쯤이면 독자 여러분들은 ‘자네, 그게 뭔 소린가? 이미 작고한 사람들 아닌가? 놀리는 건가?’하고 나무라실지 모르겠네요. 그렇습니다. 두 분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책이 남아 있어 소록도로 향하는 내게 자꾸만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남긴 책은 내내 차 뒷좌석을 지키며 한센병을 앓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고흥읍 아래 녹동까지 오는 데는 도로가 시원스럽게 확장되었음에도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10여 년 전 폐차 직전 친구 차에 동승해서 이곳까지 왔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소록도(小鹿島). 얼마나 예쁜 이름을 가진 섬인지 모릅니다. 작은 사슴, 아기 사슴의 섬! 하늘에서 볼 때 섬의 모양새가 사슴을 닮았다고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름만큼 예쁜 소록도는 섬 전체가 병원입니다. 병원의 정식명칭은 국립 소록도병원. 섬 전체 넓이가 113만 평이니까 아마 단위 병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아니 지구상에서도 가장 큰 병원이 아닐까요?
섬은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해서 환우들이 거주하는 병사지대(病舍地帶)와 직원들이 거주하는 관사지대로 나뉩니다. 이곳에서는 병원 측 허가 없이는 병사지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일반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없기 때문에 당일 육지로 나와야 하므로 이 섬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마지막 배가 언제 떠나는지를 알아둬야 합니다.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지역은 중앙공원과 해수욕장입니다.
소록도에도 그동안 변화가 있었네요. 가장 두드러진 변화라면 연륙교 개통을 들 수 있습니다. 3월 2일 임시 개통됐고 오는 5월 정식 개통될 예정입니다. 예전처럼 도선에 몸을 맡겨 섬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느꼈던 흥분은 이제 많이 쇄감할 듯싶습니다. 지난 설날에도 5일간 임시로 연륙교를 개통시켜 많은 가족들이 차를 타고 소록도의 부모를 찾아왔다고 하네요. 참, 소록도에서 거금도까지는 연도교가 건설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 소록도는 물론이고 거금도까지 육지와 연결된다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소록도를 쉽게 찾을 것 같습니다.
소록도 내의 건물은 그리 큰 변화가 없는 듯합니다. 다만 여러 건물들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아 문화재를 중심으로 답사를 즐기는 저는 어느 때보다 흥분되어 있습니다.

+ 순록탑과 신사
녹동항을 떠난 도선은 이내 소록도에 도착했습니다. 이 섬은 100년 가까이 오랫동안 외부에 제한적으로 공개되어 왔고 스스로 원했거나 강제로 끌려왔거나 한센병 환우들이 지켜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섬입니다. 이곳에 나병 환자, 문둥병 환자들로 불리던 한센병 환우들이 정착하게 된 것은 1916년부터입니다. 당시 한센병 환우들은 대부분 다리 밑이나 움막에서 살거나 유랑으로 살아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어른들이 혼자 돌아다니면 “보리밭에서 문둥이들이 나타나 너희들을 해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격리시키기로 하고 그 대상지로 바로 소록도를 주목했습니다. 섬이라서 육지와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육지와 가까워 물자 수송이 용이한 데다 물이 풍부하고 날씨가 온화했기 때문이죠.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소록도자혜의원’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섬 전체의 20%에 해당하는 30여만 평에 대한 매수작업을 거쳐 5월 17일 문을 열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환우들을 계속적으로 모집해가면서 확장세를 이어나가 1933년에는 섬 전체를 매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록도는 섬 전체가 한센병 환우들의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소록도 선착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순록탑(殉鹿塔)이 보입니다. 6 • 25 전쟁 중 6000여 원생들을 보호하다가 인민군에 끌려 학살된 10명의 직원과 1명의 목사를 추모하기 위한 탑입니다. 가운데 두 기둥은 순직한 11명을 상징하는 아라비아 숫자를 의미하며 윗부분의 둥근 폭탄 모양 조형물은 전쟁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사슴섬을 지키다 순직한 사람들을 기리는 탑이란 의미로 ‘순록탑’이라 이름 붙여 1978년 5월 17일 세웠습니다.
노천명 시인은 사슴을 일컬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고 했습니다. 이 시는 소록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 몰라도 소록도라는 아름다운 이름 뒤에는 시의 내용만큼 사슴섬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이제 비탈길을 올라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성당이 나타나고 곧 로타리가 보입니다. 그 로타리 주변에 교회, 원불교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서 놓치기 쉬운 곳이 바로 신사(神社)입니다. ‘있다, 없다’로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이끌어내던 모 TV 프로그램에 제보해도 채택될 만한 소스일 것입니다. ‘아니, 우리나라에 신사가 아직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놀라실 분이 계실 테지요? 예,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신사에 예를 갖추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신사 건물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등록문화재로 당당히 지정받았습니다. 바로 소록도에 남아 있습니다.
1935년에 세워진 소록도 신사는 일제의 잔재라고 해서 철거 논란이 많았으나 가슴 아픈 흔적이지만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자는 의미로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답니다. 사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면 소록도 전체가 철거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문화재적인 가치를 지닌 건물 모두가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사는 목조 건축양식을 모방하여 철근콘크리트와 벽돌로 건축했습니다. 원래 신사는 일본 황실의 조상이나 일본의 신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인데 이곳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셔놓고 참배하도록 했답니다. 소록도에는 이곳 관사지대 외에 병사지대에도 같은 시기에 분사(分社)를 두었습니다. 특히 부부동거를 허가할 경우 부부병사에 입사하기 전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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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탄장과 추모비
신사를 지나면 차량 통제를 하는 곳이 나타납니다. 연륙교에서 내려오는 차들이 이곳으로 통하게 되어 있고 여기에 차를 세워 두고 걸어서 중앙공원까지 가게 됩니다. 수탄장이 이곳에 있습니다. 수탄장(愁嘆場)은 ‘탄식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이 전염될까 봐 미감아 보육소에 격리되어 생활하던 환우들이 자녀들을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했던 곳입니다. 이때 미감아동과 부모는 도로 양 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났으며 만나더라도 직접적인 접촉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전염을 우려해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안고 면회를 했다고 하는데 보호인원이 많았을 때는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길옆 소나무들은 당시 풍경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을 텐데 물어봐도 말을 해주지 않네요.
수탄장을 지나서 치료본관 건물에 다다랐을 쯤 바닷가 쪽으로 추모비가 보입니다. 애한(哀恨)의 추모비라고 합니다. 소록도에도 광복의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원생들은 병사지대에 있는 신사를 불태우고 교도소의 죄수들과 감금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석방시켰습니다. 이제 일본인들이 떠나자 병원 운영권을 두고 환우들과 의사, 직원들 간에 미묘한 갈등이 찾아왔고 급기야 직원들과 환우들 간에 무력 충돌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희생이 동반됐으며 특히, 환우들은 84명이나 희생되는 참사를 빚었습니다. 이때 환우들이 집단적으로 매몰된 곳으로 짐작되는 곳을 2001년 발굴한 결과 다수의 유골이 나왔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 자리에 한센 가족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인권회복을 소원하는 의미로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한센병 환우들이 곳곳에 정착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갈등을 빚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사천 비토리(飛兎里)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습니다. 소록도 절반 크기의 섬인 비토리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고 그 결과 26명이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학교에서는 일반인 자녀들이 취학을 거부하는 일들이 빈발했으며 이것이 이른바 공학(共學) 반대 사건이었습니다.

+ 검시실과 감금실
치료 본관 건물을 지나 중앙공원으로 갈 무렵 오른편에 붉은색 벽돌로 지은 건물들이 시선을 끕니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검시실과 감금실입니다. 두 건물 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은 1935년 건물입니다. 검시실(檢屍室)은 해부실로 불리기도 합니다.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앞쪽 방은 주로 사망환우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사용되었으며, 뒤쪽 방은 정관절제를 집행했던 곳입니다. 모든 사망환우는 본인 및 가족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이곳에서 사망원인에 대한 해부절차를 마친 뒤 간단한 장례식을 거쳐 섬 내 화장장에서 화장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되었다고 합니다.
일제는 1936년부터 정관절제를 할 경우 부부 동거를 허용했다고 하는데 감금실에 수용되었다가 출감하는 환자들에 대해서도 그 벌칙의 하나로 행해졌다고 합니다. 일본인 병원장의 명을 거역한 벌로 감금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단종수술을 받은 환우의 시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제게 묵직한 그 무엇을 부담 지웁니다.
감금실(監禁室)은 인권탄압의 상징물입니다. 두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H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에 의하여 한센환자는 직업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 이동권을 박탈당했으며 수용환자들은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감금, 감식, 금식,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시 한 편이 당시 인권탄압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감금실               
                               
- 김정균

아무 죄가 없어도 불문 곡직하고 가두어 놓고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 주느냐
억울한 호소는 들을 자가 없으니
무릎을 꿇고 주께 호소하기를
주의 말씀에 따라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중략)…
저희들은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다음 호도 소록도에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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