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록도역사관, 한센병 자료관
지난 호에 이어 소록도를 찾아갑니다.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검시실과 감금실 맞은편에는 자료관이 있습니다. 자료관은 제1관 소록도역사관과 제2관 한센병자료관으로 나뉩니다. 소록도역사관은 병원 현황, 원생의 생활 모습, 영부인 기념대, 사건과 인물, 자연환경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고 한센병자료관은 한센병 관련 역사적 인물, 치료기구, 문예작품, 도서, 한센병의 과거와 현재, 한센병치료제 등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작지만 소록도와 한센병에 대한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어 소록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곳입니다.

소록도역사관에서는 소록도 사람들이 쓰는 말에 대해 정리해 놓은 패널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 소록도에서 생활하는 환우들을 일컬어 ‘문 씨(文氏)’ 또는 ‘한 씨(韓氏)’라고 부르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예전에 한센병 환우들을 비하해 문둥이, 나환자 등으로 부른 것에 대해 자신들을 좀 더 높여 부르는 의미로 문 씨라고 불렀고 이후 한센병의 원인을 발견한 학자의 이름에서 한 씨라는 성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답니다. 또, 이 섬에서 ‘모집(募集)’이라는 말은 1930년대 병원 확장 당시 전국에서 수차에 걸쳐 행해졌던 강제수용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이렇게 모집되어 온 환자들은 대개 젊고 건강해 중증환자의 병간호 또는 병원 내 잡다한 작업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이란 이름은 노르웨이의 세균학자인 한센(1841~1912)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는 1873년에 나결절(癩結節)의 세포 내에서 한센균을 발견해 한센병이 유전이나 천형병이 아니라 단순한 전염병임을 밝혀낸 사람입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왕 때 최초로 국가적 차원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치료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제주도에 나질(환센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제주 안무사가 계를 올려 말하기를, 주 및 정의와 대정에 나질이 흥행하고 있습니다. 만일 병을 얻은 사람이 있으면 전염될 것을 두려워해 해변의 사람이 없는 곳에 옮겨 놓습니다. 그 환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바위 낭떠러지에 떨어져 모습을 잃으니 진실로 가련하고 불쌍합니다.’
+ 중앙공원의 명암
소록도를 찾는 외부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바로 중앙공원일 것입니다. 중앙공원은 소록도 해수욕장과 더불어 외부에 개방되는 대표적 명소입니다. 공원은 소록도갱생원 시절인 1936년 12월 1일에 착공해 3년 4개월의 공사 끝에 1940년 4월 1일에 완공되어 ‘부드러운 동산’이라 불렀답니다. 연 6만여 명의 불구원생이 강제 동원되었는데 산림을 깎아 6000평 규모의 용지를 조성하고 완도, 득량만, 주변 도시에서 암석을 채취해 운반했으며, 관상수는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반입해 식재했다고 합니다. 이후 1971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공원용지 확장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공원에는 솔송, 능수매화, 황금편백, 반송, 삼나무, 돈나무, 매화, 나한송과 같이 독특한 형태의 관상수를 비롯해 공덕비나 시비, 방문기념비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 뒤에는 수많은 원생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더욱더 애절한 마음이 듭니다.

공원을 조성할 당시 원장으로 있던 일본인 수호 원장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4대 원장으로 1933년부터 8년 9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환자들을 동원해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한 장본인입니다. 환자들에게 기금을 강제 징수해 1940년 8월 20일 자신의 동상을 세운 후 매월 20일을 ‘보은감사일’로 정해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했습니다. 또 연간 140만 장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벽돌 공장을 지었으며, 벽돌 제조, 자재 하역, 골재 운반, 도로 개설, 도배 등 힘들고 험한 공사에 원생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확대되자 송진을 채취하고 연간 1500장의 토끼가죽과 3만 포의 숯을 제조하는 등 전쟁 군수 물자 생산에도 동원했었다네요. 이렇게 1차, 2차, 3차 확장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집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소록도를 세계 최고의 나요양시설로 만들겠다는 그는 결국 참다못한 원생 이춘상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이에 반해 소록도에는 원생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하나이 원장 창덕비가 남아 있습니다. 제2대 원장이었던 일본인 하나이 원장은 1921년부터 1929년까지 8년 동안 재직하면서 원생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는데, 일상생활에서 일본식을 강요하던 초대 원장과 달리 환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를 상당히 완화하고 본가와의 통신이나 면회,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용하고 교육의 기회도 넓혀줬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원생들 스스로 모금한 돈으로 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광복 후 일제 잔재 청산정책에 의해 비석이 폐기될 위기에 처하자 원생들이 몰래 땅에 묻어둔 것을 5 • 16 이후에 발굴해 중앙공원 입구에 다시 세웠다가 1988년 원래의 자혜의원 옆에 옮겨 세워두었습니다. 역대 원장들은 저마다의 천국을 가꾸기 위해 애썼겠지만 결국 그것은 ‘당신들의 천국’일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청준의 소설<당신들의 천국>에서 드러나듯이 천국을 가꾸어 나가려는 데 병원 측과 환우들 간의 갈등은 명약관화한 과제였을 터입니다. ‘우리들의 천국’을 건설한다면서 결국 자신을 영웅화하고 환우들을 착취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환우들과의 충분한 대화와 타협이 없는 천국 건설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속 조 원장의 오마도 간척사업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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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탑 + 소록도를 찾은 사람들
중앙공원에는 소록도를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간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공적비도 있습니다. 다미안공적비와 세마공적비가 그것입니다. 또, 공원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구라탑(救癩塔)은 1963년 8월 1일에 완공되었는데 미카엘천사가 사탄을 밟고 있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환우들의 자립을 위한 오마도 간척사업을 펼칠 때 국제평화봉사단으로 소록도를 찾아온 국제워크 캠프단이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병원 측과 의논해 세웠다고 합니다. ‘한센병은 낫는다’는 글귀가 사방으로 드러나 있어 한센병을 현대의학으로 뿌리 뽑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돋보입니다.
생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소록도를 두 번이나 방문했습니다. 그의 방문 이후 소록도의 환우들과 일반인들과의 차별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합니다. 교황이 방문했던 성당 건너편에는 육영수여사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이미 불구가 되어버린 의지할 곳 없는 고령자들을 위해 양지회 기념회관을 마련해준 영부인을 기리는 비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준공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준공 3개월 전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소록도를 직접 찾은 최초의 영부인은 이희호 여사였습니다. 여사는 2000년 5월에 소록도 방문했는데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자원봉사회관 건립을 약속한 후 2001년 11월 완공했습니다.
+ 한하운 시비
한하운은 대표적인 한센병 환우였습니다. 그가 쓴 <나의 슬픈 半生記>에 처음 한센병을 진단받았을 적 상황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성대 부속병원을 찾은 한하운은 기타무라 박사에게서 처음으로 한센병 판정을 받게 됩니다. 박사가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고 했지만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사는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하면 낫는다고 했답니다. 뇌성벽력 같은 선고 앞에 앞이 캄캄해진 시인은 그 판정을 부정하고 부정했다고 하네요. 공원에는 그의 대표작 보리피리 시비가 있습니다. 그가 쓴 또 다른 시에서는 한센병을 앓는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죄인처럼 살아가야 했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소록도의 학교
소록도는 등록문화재, 즉 근대 보물로 가득한 섬이기도 합니다. 구 소록도갱생원 검시실, 구 소록도갱생원 감금실, 구 소록도갱생원 사무본관 및 강당, 구 소록도갱생원 만령당, 구 소록도갱생원 식량창고, 구 소록도갱생원 신사, 구 소록도갱생원 등대, 소록도 구 녹산초등학교 교사, 소록도 구 성실중고등성경학교 교사, 구 소록도갱생원 원장관사가 모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 녹산초등학교는 1935년경 사설 보통학교로 건립된 초등학교로,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자체적으로 설립한 초등학교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1961년 8월 3일 문교부의 사립 인가를 받았고 이후 1987년 2월 더 이상의 입학생이 없어 폐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녹산중학교는 1946년 9월 17일에 설립해 1967년 5월까지 병원에서 운영하고 1967년 6월부터 성실고등공민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교회에서 운영했습니다. 성실고등성경학교는 1957년 5월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소록도교회에서 설립했고 이후 인문고등학교 교육과정으로 전환했으나 80년대 말 더 이상의 입학생이 없어 폐교되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병원에서는 아이들에게 병이 전염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이들을 격리할 영아원과 보육소를 운영했습니다. 환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즉시 영아원으로 보내져 만 3세까지 양육된 후에 보육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지금 소록도에는 학생들이 있는 유일한 학교로 소록도분교가 있습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아주 작은 학교이지만 섬 이름만큼 예쁘게 꾸며져 있습니다. 특히, 모 대학에서 건물 벽에 그려 준 재미있는 그림들은 같은 분교에 근무하고 있는 제게 벤치마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소록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연륙교가 정식으로 개통되었습니다. 다음에 소록도를 찾을 때는 승용차로 갈 것 같군요. 이제 한결 가까워진 그 길로 인해 소록도가 섬사람들과 바깥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편리해진 교통으로 이 섬이 더 이상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천국으로 바뀔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소록도의 붉은 벽돌 건물들, 중앙공원의 울창한 숲, 해수욕장의 소나무 숲이 자꾸만 저를 유혹하고 있네요. 여름방학이 오면 얼른 떠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