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 최북단의 매력적인 섬

그러니까 백령도 용기포 선착장에 도착하기까지 딱 12시간이 걸렸나 봅니다. 자정에 출발한 서울발 심야버스는 새벽 4시 30분경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했고, 한 시간 정도 터미널 근처에서 대기했다가 전철을 타고 인천 연안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는 정각 8시에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4시간 조금 넘게 달린 끝에 백령도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 그리고 남한의 PSI 전면 참여, 개성공단 문제 등으로 어느 때보다도 남북 간 긴장이 팽팽한 때 서해 5도 중 한 곳인 백령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예상외로 백령도는 침착하고 조용했습니다. 지리적으로 백령도는 북한과 훨씬 가깝고 바다 건너에 북한 황해도가 한눈에 들어오기에 유사시에 어떤 상황이 발발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잔잔한 바다만큼 흔들림 없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진촌리에서 만난 어떤 주민은 오히려 그런 긴장감이 있기에 훨씬 여유로운 곳이라고까지 합니다.
하지만 주민들과 달리 군인들을 보면서 미묘한 전운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휴가 나온 군인들은 군복을 입은 채 대기 상태로 언제든지 부대로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점점 더 많은 병력이 섬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조업하던 중국 어선들은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고, 북한은 군사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대거 군사력을 서해안 쪽으로 집결시켜 두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백령도를 포함한 우리 땅 서해 5도는 북한으로 봐서는 목에 가시와 같은 곳입니다. 서해 5도로 인해 북방한계선(NLL)이 생겼고, 그 북방한계선으로 인해 개성이나 해주 쪽에서 서해로 진출하려면 황해도 해안선을 따라 백령도와 가까운 장산곶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우리로서는 서해 5도를 확보함으로써 인천 앞바다를 통해 곧바로 서해로 진출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백령도에는 해병대 6여단을 중심으로 공군, 해군 등 국군이 배치되어 서해 최북단 우리 영토를 지키고 있습니다.
백령도는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에 속합니다. 전체 인구는 4000여 명, 남한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입니다. 옹진군은 북도면, 연평면, 대청면, 덕적면, 자월면, 영흥면 등 서해에 떠 있는 섬을 껴안고 있습니다.
백령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냉면집이 눈에 띕니다. 황해도식 냉면집이 대부분이라는데, 어느 식당에서 먹어본 냉면은 메밀로 만들어 시원했습니다. 짠지떡도 유명한데 이것은 백령도 사람들이 짠지라고 부르는 김치를 잘게 썰고 굴이나 조개 등으로 소를 만들어 먹는 것으로 생김새는 만두와 비슷합니다.
백령도 까나리액젓의 명성도 알아줍니다. 곳곳에서 숙성용 저장용기를 볼 수 있고 소금을 만드는 염전도 한 곳 있습니다. 그밖에 전복, 해삼, 우럭 등 신선한 해산물이 풍부한데 여행 기간 중 사자바위를 앞에 둔 고봉포구에서 본 팔뚝만한 숭어 떼가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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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곶해안, 콩돌해안, 점박이물범

군사적, 지리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백령도는 그동안 자연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몇 점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지정된 사곶해안은 규암 가루가 층층이 쌓이고 그 모래 사이에 뻘이 뒤섞여 형성되었습니다. 그 단단하기가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할 정도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곳은 1970년대까지 비행기 이착륙 용도로 이용되었다는데 이탈리아 나폴리 해안과 함께 전 세계에 두 곳밖에 없는 천연비행장이라고 합니다. 4㎞에 이르는 긴 백사장은 해송이나 해당화와 함께 어울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해수욕장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된 콩돌해안은 말 그대로 콩알만한 돌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제 색깔을 잃은 녀석들이 물을 만나면 제 색깔을 드러내는데 그 화려함이 끝내 줍니다. 일반적인 모래사장을 밟는 느낌이나 굵은 몽돌해변을 밟는 느낌과는 다른 이색적인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이 해안은 백령도의 모암인 규암이 해안의 파식작용에 의해 마모를 거듭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똑같은 콩돌이 물을 만나면 색깔을 드러내고 그렇지 않은 곳은 제 색깔을 잃고 맙니다. 남북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결국 같은 색깔, 같은 모양인데 단지 드러나는 색깔이 다를 뿐이지 않을까요?
백령도의 중심지는 진촌리입니다. 고려시대 이후로 진(鎭)이 설치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진촌리 하늬바다에는 천연기념물 제393호로 지정된 감람암 포획 현무암 분포지가 있습니다. 이곳 현무암을 자세히 보면 그 속에 황록색을 띤 감람암 암편들이 보이는데 이것은 용암 분출시 지하 맨틀 층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땅속 깊은 암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데요, 지금은 사람들에 의해 많이 채취되어 곳곳에서 감람암이 빠져나간 흔적만 남아 있는 듯합니다. 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이 이렇게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하늬해변 일대 농경지는 진촌리 패총지역으로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맷돌을 비롯하여 토기, 돌도끼, 동물 골편, 돌 어망추 등 선사시대부터 옹진군에 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것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천연기념물 제331호인 점박이물범은 백령도 주변에 약 200~300마리가 서식하고 있는데 하늬해변 앞 물범바위와 두무진 일대에서 잘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행을 하는 기간에는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백령도를 왕복하는 여객선의 운항횟수가 늘어나고 4시간 남짓이면 육지에 도착하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외지인의 경우 편도 6만 원에 가까운 승선비가 들지만, 인천광역시민의 경우는 50% 할인의 혜택이 있고 백령도민일 경우에는 5000원으로 이용할 수 있어서 접근성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섬 주민들이 큰 병원을 갈 때도 훨씬 더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외부인들의 방문 기회가 많아지는 만큼 백령도의 자연을 그대로 남겨두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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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각과 두무진, 용트림바위
심청전의 주 무대가 어디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그 무대가 황해도 황주와 장산곶, 백령도 일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백령도에는 심청과 관련한 곳이 몇 군데 전해집니다. 심청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는 지금은 북측 바다에 있기 때문에 가지는 못해도 눈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또, 심청이 연꽃에서 다시 태어난 것을 말해주는 연화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연화리에는 옛날에 많은 연꽃들이 피어났다고 합니다. 그밖에 연꽃이 떠내려와 걸렸다는 연봉바위도 있습니다.
이런 심청의 고장 백령도에 1999년 심청각이 문을 열었습니다. 1층에서는 효와 관련한 자료와 소리, 영화, 소설로 심청전을 만날 수 있고 2층은 옹진군의 역사, 백령도 홍보, 북녘 땅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건물 바깥에는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들기 직전의 모습을 조성해 기념상으로 설치해두었고요, 심청각 오른편으로는 화포와 탱크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포구(砲口)는 북쪽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1층 전시관에는 효를 실천한 이야기 속 인물들이 몇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손순매아(孫順埋兒)’ 이야기도 있습니다. 손순이 모친의 음식을 뺏어 먹는 어린아이를 산에 묻기로 하고 갔더니 돌로 된 종이 나와서 아이를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집에서 그 종을 두드리니 그 소리가 흥덕왕에게 전해지고 왕은 그 사연을 알고는 후한 상을 내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효를 강조하는 내용은 지역 곳곳에서 전래되고 있는데 울산의 경우에는 송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심청각 2층에서 북녘 땅을 바라봅니다. 남과 북 사이에는 잔잔한 바다만 있을 뿐입니다. 그 바다에는 지도에서 본 북방한계선 표시도 없고 이념의 대립도 없습니다. 그저 푸르른 바다 위에 배 한 척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잠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북한 측 해안과 백령도 북측 해안을 중심으로는 상대방을 경계하기 위한 지뢰가 수없이 매설되어 있을 테고 각종 무기로 중무장되어 상대방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겠죠?
‘백령도’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두무진(頭武津)에 가면 인당수가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두무진은 명승 제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대암, 형제암, 코끼리 바위 등 해안선을 따라 깎아지른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어우러져 마치 장군들이 회의를 하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합니다. 서해의 해금강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장산곶까지는 보이지 않는 금줄만 아니라면 배를 타고 20분만 달리면 닿을 것 같습니다.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두무진 일대에는 통일로 가는 길 비, ‘통일기원비’가 서 있고 1970년 7월 9일 23시경 나포된 백령도 어민들 중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서 의외의 수확이라면 용트림 바위를 찾아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용트림 바위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바위는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라고 하지만 그 바위 자체보다는 일대가 갈매기와 가마우지떼의 집단 서식지이기 때문에 절벽을 이룬 곳에 틈을 비집고 자리 잡은 놈들을 만나는 기쁨이 대단합니다. 바로 눈 아래에 갈매기 알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미는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백 마리는 됨직한 갈매기떼가 군사작전이나 한 것처럼 저를 향해 쌩 날아오더니 머리 바로 위로 지나갑니다. 저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태세입니다. 제가 침략자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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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년의 역사 가진 중화동교회

백령도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졌다는 장로교회인 중화동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을 넘어섭니다. 교회 옆에는 백령기독교역사관이 있어 백령도 지역 기독교 전래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역사관의 자료를 바탕으로 중화동교회의 설립과 기독교 전래사를 정리해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영국인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 이들은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안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1816년 영국함대가 백령도에 처음으로 개신교의 씨앗을 퍼뜨렸고 1832년에는 백령도를 방문한 귀츨라프 선교사가 처음으로 백령도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1846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가 막혀버린 육상통로 대신 서해상을 통해 신부들이 육지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열기 위해 백령도 근해에 나타났다가 옹진반도 인근 순위도에서 관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척해 놓은 서해상의 잠입통로를 통해 1880년까지 무려 17명의 신부들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해상 항로의 거점은 백령도였습니다. 1865년에는 토머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함으로써 개신교 첫 순교자가 됩니다.
1880년 중반에는 서상륜 형제의 주도로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가 탄생하게 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지리적으로 가까운 백령도에도 중화동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중화동교회는 허득의 주도로 세워진 자생교회이자 백령도의 모교회(母敎會)로 이를 계기로 대청도와 소청도 같은 인근 섬에도, 옹진반도와 대동반도에도 교회가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대개 섬이라면 전래 민간신앙이 두터운 편인데, 이 지역은 중국을 드나드는 통로로 각국의 배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인지 일찍이 새로운 문화에 좀 더 빨리 눈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들어서고 난 뒤에 위기도 찾아왔는데요, 해산물을 잔뜩 실고 몽금포로 떠난 배가 갑자기 일기 시작한 바람과 파도로 파선되어 결국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배가 파선된 원인이 해신(海神)을 믿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며, 교회에서 서낭제를 못하게 한다고 해서 전래 민간신앙과 교회와의 충돌이 컸다고 합니다.
인천으로 향하는 여객선에서 생각해 봅니다. 이 백령도에서 군인들이 없어질 날이 언제일까, 우리나라 최서단 땅이라며 백령도가 아닌 평안북도 마안도로 마음대로 찾아갈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백령도의 백령(白翎)은 ‘흰 날개’를 의미합니다. 갈매기 떼가 흰 날개를 휘젓고 마음껏 날아다니는 이곳이 대립과 긴장의 섬이 아니라 통일을 가장 먼저 기다리는 희망의 섬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