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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몸으로 부딪힌다! 그 남자의 고군분투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거북이가 결국에는 토끼를 누르고 승리한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거북이 달린다>는 촌스럽고 무능하지만 경주를 포기하지 않고 결국 승리를 쟁취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우화 중에 ‘토끼와 거북이’가 있다. 말 그대로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벌였는데 발 빠른 토끼가 한참을 앞서 나가다가 거북이의 그림자도 안 보일 정도로 앞지르게 되자 한 숨 쉬어가려고 낮잠을 잔다. 느린 거북이는 죽을힘을 다해 기어가도 토끼를 쫓아갈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경주에 임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토끼는 꾀를 부리는 나태함으로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게 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성실한 거북이에게 지고 만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우화이고 동화이다. 현실에서는 느리고 둔한 거북이가 영리하고 부지런한 토끼를 이기는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드물다고 해서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박한 현실 세계에서도 아주 가끔씩 눈물겨운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위로를 받으며 희미한 가능성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주어진 삶을 열심히 꾸려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냉정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비정한 경쟁 사회를 그려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용기와 진심이 승리한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통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삶에 지친 관객들에게 위안을 선사한다. 배우 김윤석이 두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리는 영화 <거북이 달린다>도, 촌스럽고 무능하지만 경주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의 손을 들어준다.

시골형사와 탈주범의 대결
어수룩한 형사가 지능적인 범인을 뒤쫓는 이야기의 얼개와 캐릭터가 김윤석의 전작 <추격자>와 비슷한 느낌을 준 <거북이 달린다>. 개봉 전에는 내심 <추격자>의 아류작(?)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괜한 기우였다. 막무가내 형사로 분한 김윤석의 모습에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거북이 달린다>는 <추격자>가 구축한 형사 - 범인의 대결 구도를 변주하고 기존 형사물의 장르적 관습도 살짝 비켜가면서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충남 예산의 시골 마을, 조필성 형사(김윤석)가 속한 강력반의 일상은 점심내기 바둑을 두며 소일하는 노인들의 하루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별다른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아 심심하기 짝이 없는 시골 형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지역 행사 ‘소싸움대회’다. 경제권을 쥐고 있는 연상의 아내에게 구박받고 어린 딸에게조차 잔소리를 듣는 조 형사는, 아내가 땀 흘려 모은 쌈짓돈을 몰래 들고 나와 소싸움판에 건다.
동네 동생이자 양아치인 용배(신정근)를 통해 우승 후보 정보를 입수하고 세심한 관찰력을 동원해 우승 상금을 획득한 조 형사. 간만에 가족들 앞에서 어깨를 펼 수 있게 된 기쁨에 목이 메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탈주범 송기태(정경호)에게 상금을 도둑맞고 애꿎은 피해자가 된 조 형사와 송기태의 힘겨운 술래잡기가 시작된다.
‘빠른 놈 위에 질긴 놈’이라는 카피가 말해주듯 <거북이 달린다>는 ‘느림보’ 조 형사가 ‘날쌘 돌이’ 송기태를 잡는 과정이 주요 플롯이고, 두 상반된 캐릭터가 펼치는 대결을 얼마나 밀도 있게 묘사하느냐가 영화의 관건이다. 불룩 처진 배에 싸움은 고사하고 총기 건사도 못하는 시골 형사와, 출중한 싸움 실력과 영리한 두뇌를 가진 신출귀몰 탈주범의 대결. 누가 봐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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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직한 연기, 순박한 유머

실제로 형사라는 직업이 무색할 정도로 송기태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는 조 형사, 심지어 “너 형사 맞냐”라는 말까지 듣고 갖은 굴욕을 당하며 매번 코앞에서 송기태를 놓치고 만다. 하지만 제목 ‘거북이 달린다’가 암시하듯, 이 싸움의 승자는 빠른 토끼 송기태가 아니라 느린 거북이 조 형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끼와 거북’의 우화에서, 태생적 우월함을 이용해 저만치 내달려버린 토끼를 앞지르며 거북이가 승리한 원동력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낸 ‘인내심’과 ‘성실함’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주목하는 지점도 송기태를 뒤쫓는 조 형사의 뚝심과 끈기다. 동료 형사들의 도움조차 받지 못한 조 형사는 용배 무리와 힘을 모아 나름 치밀한(?) 작전을 세우며 송기태를 압박한다. 물론 무모하고 미련스러운 그들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하지만 조 형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처음엔 잃어버린 우승 상금을 되찾고자 이 싸움판에 뛰어들었지만 송기태에게 굴욕을 당하면서 점점 오기가 생긴다. 결국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고 한이 맺혀서” 꼭 잡고야 말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무술 실력이 뛰어난 형사들도 우후죽순 나가떨어진다는 송기태(다소 무리한 설정이지만 ‘신창원’을 기억한다면 그리 비현실적이지도 않다)와 대적하기 위해 최후의 필살기를 배우는 조 형사. 단 한 번의 급소 가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이 필살기를 몸치 조 형사가 과연 써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독기품은 조 형사, 결국 해내고 만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마지막 대결 신은 소싸움장인 모래판에서 벌어진다. 소싸움대회에서 누구나 우승 후보라고 단정했던 소의 약점을 찾아내 새로운 우승소를 맞췄던 조 형사의 집념은 이번엔 더 강해졌다. 송기태의 아킬레스건을 물고 늘어진 후 끝내 그를 쓰러뜨리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상처를 입고도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상대를 향해 돌진하는 소처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두 사람의 이 무식한 육탄전은 흥미진진하지만 지켜보기 괴롭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판에서 사력을 다하던 조 형사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고 쓰러지는 장면에 이르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송기태로 인해 파면되고 가족과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며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들에게 조롱당했던, 무능한 형사로 마음고생하면서 흘렸던 그의 땀과 눈물이 안쓰러워서이다.

가족, 거북이를 달리게 만들다
영화 <거북이 달린다>는 외관상 형사와 탈주범 간의 대결 구도를 그리고 있지만 그 본질은 가족들에게 떳떳한 가장이 되고 싶었던 인간 조필성의 고군분투에 있다. 구멍 난 속옷을 입고 손이 부르트게 일하는 아내와 “울 아빠가 형사”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딸 앞에서 늘 고개 숙인 남자였던 그가, 우연한 계기(송기태와의 만남)를 통해 탈바꿈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해 보이던 거북이를 달리게 한 것은, 아내에게 속옷 하나 사주는 게 꿈인 못난 남자가 목숨걸고 싸워서 지켜낸 것은, 바로 ‘형사 아빠로서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딸과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그 약속, 소박한 꿈이 이루어진 순간, 가족과 동네 사람들 앞에서 머쓱한 미소를 짓는 이 투박한 남자의 등짝을 툭툭 두드려주고 싶어진다.
<추격자>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은 눈부시다. 이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그는 작품 편수가 쌓일수록 놀랍게 진화하는 듯하다. 캐릭터에 밀착되면서도 한층 더 여유로워진 그의 연기에, 남편을 구박하면서도 편이 되어주는 견미리(조 형사 아내 역)의 안정된 연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비중이 적은 조연들의 연기도 무난하다. 특히 야밤 잠복근무에 하얀 점퍼를 입고 오는 어리숙한 양아치, 용배 역 신정근의 감초 연기는 영화에 코믹함을 더한다. 다만 대결의 한 축인 송기태 캐릭터가 너무 밋밋해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지만, 욕심내지 않고 한걸음씩 내딛는 영화의 우직함과 유머 감각이 훈훈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한다.

감독 : 이연우
배우 : 김윤석, 정경호, 견미리
관람정보 : 15세 관람가, 117분

★ <거북이 달린다>는 이연우 감독이 데뷔작 <2424>의 실패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장편 영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경기에 제작을 끝낸 영화들이 창고에서 썩고 있는 영화판에서, 어렵사리 두 번째 자식을 세상에 내놓은 그의 감회가 어땠을까…. 그의 영화에서 거북이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면서 감독은 제일 먼저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을까. <거북이 달린다>는 영화의 만듦새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진정성이 강한 뚝심을 발휘해 비평과 흥행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살다 보면 그렇게 인생 역전의 기회는 찾아온다. 물론 이연우 감독처럼 ‘오랜 세월동안 포기하지 않고 칼을 갈았을 때’ 라는 단서가 붙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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