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링(Lettering)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서로의 사정이나 뜻을 전하는 ‘편지쓰기’를 말한다. 이른바 아날로그 시대에는 전통적으로 가족이나 친지 간에 애틋한 사연이나 소식을 전하면서 ‘서간문(書簡文)’이라는 고유의 문형(文型)을 만들기도 했던 것이 통신의 발달과 더불어 전자시대로 접어들면서는 형식이나 방법도 크게 변했다. 이번 호에서 소개하려는 레터링의 의미는 좀 다르다. 여기서 의미하는 레터링은 특정한 상대에게 소식이나 사연(事緣)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 속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로(吐露)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필체나 글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논리구조까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며 절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수업에서의 Lettering 초기에는 이 방법을 국어 학습에서만 활용했다. 소설문을 가지고 수업을 할 때 학습자들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자유롭게 선택해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도록 했다. 이를테면 ‘심청전’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면 심학규, 심청, 뺑덕어멈 곽 씨 부인, 뱃사람, 동네 사람, 봉은사 시주승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자신이 관심이 있는 인물에게 편지글을 쓰는 것이다. 대상은 사람뿐 아니라 등장하는 연꽃, 용왕, 물고기까지도 포함한다. 이 학습 활동을 전개하는 데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 글쓴이를 밝히지 않는다. 필자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글 쓰는 이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솔직한 심정이나 감정을 유도할 수 있다. 둘째, 내용, 형식, 표현방법에 대해 구애받지 않는다. 띄어쓰기는 물론이고 맞춤법이나 구두점 같은 것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편지 양이나 내용 그리고 형식도 자유롭게 한다. 글로 써도 되고 그림으로 그려도 되며 두 가지를 종합해도 좋다. 은어나 비어도 허용한다. 되도록이면 필자의 정서와 감정이 자유로운 가운데서 자유로운 발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글을 쓰고 난 후에는 필자가 후련함(Catharsis)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절대로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작품을 평가하지 않는다. 게시도 교실 뒷면의 작품판에 필자 자신이 자유롭게 부착한다. 넷째, 한 번 쓰는 게 아니라 학습이 진행되는 동안 몇 차례 쓰게 한다. 첫 시간에 써보고 교수 · 학습이 진행하는 과정에서 한두 번, 과정의 정리 단계에서 한 번 써보게 한다. 본시 학습뿐만 아니라 소풍을 갔을 때 나무나 바위 같은 주변 사물에게 보내는 편지도 쓴다. 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때와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다음은 가지가 부러진 나무에게 쓴 편지다.
가지가 부러진 나무에게- 나무야, 나무야, 누가 네 가녀린 팔뚝을 꺽어 놓은거니. 불쌍하고 가련한 나무야. 틀림없이 심술궂고 성질머리 나쁜새끼가 그랬을거야. 그 놈이 네 팔뚝을 부러뜨릴 때 넌 얼마나 아팠니.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겠지만 그 새낀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거야. 내가 그런 놈을 보았다면 혼을 내줄 텐데. 그 놈의 팔둑도 부러뜨려 두동강이를 냈으면 시원하겠다. 나무야 불쌍하고 슬픈 나무야 나는 떠나도 넌 여기서 꾹 참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더욱 잘 자라거라. 내가 이담에 왔을 땐 너도 다 나아서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어. 나무야 사랑한다.
다음은 김치를 편식하는 어린이가 점심시간에 쓴 작품이다.
김치야, 지겨운 김치야, 오늘도 또 왔냐. 난 점심시간 만 되면 니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진저리가 난다. 뻘건 고춧가루에 시큼한 냄새, 걸레같이 너줄너불한 덩어리… 내가 싫은걸 너도 알고 있겠지, 샌님 땜에 할 수 없이 가지고 온다는 것쯤을 알고 있을 거야. 또 내 눈 앞에서 떡 버티고 잇는 샌님의 눈초리 땜에 먹어줘야 하는 나를 보면서 넌 무슨 생각을 하니. 아마 웃고 있을거야. 기분 좋아서. 나도 니가 싫어서 입속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버릴거다. 알았니.
여기서 생산된 작품은 일회용이 아니다. 교수 · 학습 시간마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여기서 생산된 자료를 수합해 표지와 삽화를 곁들여 작품집을 만들어 여러 사람이 수시로 읽고 감상하며 ▲내용 읽고 전체적인 느낌 발표하기 ▲나와 다른 점, 다른 생각, 다른 표현 찾아보기 ▲본 작품을 이어서 속편 써보기, 말로 표현해보기, 보충(보완)해보기 등의 심화학습으로 발전시킨다. [PAGE BREAK] 생활지도에서의 Lettering 생활지도를 하다 보면, 교사가 곤궁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쩌다 잘못하면 사제간에 인간적인 상처로 남아 졸업 후에도 후유증을 남길 수 있어 매우 조심스러운 경우도 있다. S초에 근무하던 시절에 있던 이야기다. 셋째 시간 중간, 교실에서 도난 사고가 발생했다. 필통 속에 접어두었던 5000원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교내에서 그런 사건 · 사고가 적지 않게 일어났다. 필통 속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아이들의 옷 속에 있는 물건이나 돈이 없어지기 일쑤고 운동장에서 체육 시간을 마치고 교실에 들어오면 심지어는 교사용 책상 속에 있던 물건까지 없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 사건으로 교실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됐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연배가 높은 선배한테 가서 상의했더니 시큰둥하면서 그런 사소한 걸 가지고 왜 당황하느냐고 오히려 핀잔을 한다. 정황으로 보니 교실에 현행범이 있는 거니까 모두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책상에 엎드리게 한 다음 도둑질에 대해 나쁜 점을 일장 훈시(訓示)한 후 “나하고 너하고만 알고 말 테니까 돈을 가져간 사람은 손가락을 살짝 올려봐라”라고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방법에 선뜻 끌리지 않았다. 첫째는 돈을 훔쳐간 아이가 스스로 손을 들게 할 만큼 감동적인 훈시를 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고,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향후 그 아이와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과 걱정이 나를 가로막았다. 아무리 아이와 나만이 아는 일로 한다 할지라도 그 녀석은 자라면서 평생을 두고 나와의 악연(惡緣)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는 그 아이가 학교생활을 할 때 상당히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수를 했다고 해도 학교 안에서 나하고 서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자기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심한 자괴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고 졸업 후에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자유스럽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일종의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앞으로 교실에서 이런 사건이 계속 발생했을 때마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해결해야만 할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나에게 그런 방법은 교실에서 발생한 도벽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치졸한 대증적(對症的) 해결방법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민 고민을 하다 경험이 풍부한 학년 주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턱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30여 년 교단에서 겪은 여러 가지 사안을 꺼내면서 그 해결 방법에 대해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속전속결할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며 이 일이 끝나면 언제 밥을 사야만 한다고 했다. 그녀가 가르쳐 준 방법은 이렇다. 먼저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은 다음에 거기에 빨간색의 포스터물감을 푼다. 되도록 혐오감이 들도록 해야 하니까 농도를 진하게 하면 할수록 효과적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 사람씩 나와서 거기에 손을 담그라고 한다. 그때 매우 강도 있게 “돈을 훔쳐간 사람은 손이 오그라진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것을 실시하기 전에 아이가 와서 먼저 고백을 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실제로 손이 오그라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로서는 그것도 도저히 따라 할 수는 없었다. 그때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Lettering’이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일장 훈시를 했다. “지금 너희들이 들은 바와 같이 지금 우리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났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현재 우리 교실에 도둑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린 도둑의 친구이고 우리 교실은 도둑반이고 나는 도둑의 선생님이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학교는 도둑 학교가 되고 이 나라는 도둑나라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표정이 점점 경직되었다. “내가 너희들을 ‘도둑의 친구야’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떻게 될 것 같니? 밖에 나가서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도둑학교에 다니는 도둑 친구들’ 이라고 한다면 기가 막힐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인 걸 어쩌니….” 교실이 소요되더니 “야, 누구냐, 빨리 자수해 광명 찾아!”라고 소리치는 아이도 있고 잃어버린 돈이 얼만지 그걸 우리들이 걷어 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아이도 있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서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몇 시간째 냉각 상태에 있던 교실에서 장시간 모욕적인 훈화를 들어 아이들이 극도로 흥분 상태에 있을 때 A4 용지를 한 장씩 나누어 주며 도둑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라고 했다. 편지를 조그마한 상자에 수합했다. 그리고 앞에서부터 아이들이 차례로 나와 무작위로 뽑아서 큰 소리로 낭독하게 했다.
야, 도둑놈아. 돈을 훔쳐다가 뭘 하려고 한거니. 돈을 훔친 사람은 이 담에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 고생하다가 뱀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 빨리 니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해라.
상자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대신해서 읽는 것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 쪽에서도 쓴 사람 쪽에서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아 아이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심한 것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도 적지 않았다. ‘도둑’을 포함해 70여 명의 어린이가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이 같은 일을 지속했기 때문에 모두 심신이 피로해 있었다. 3교시에 사건이 발생한 후 6교시까지 짜증 나는 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종례 시간에 내가 엄숙하게 한마디 했다. “오늘 수고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이것을 한 가지라도 잊어버리면 내일 큰일 납니다.”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다 말고 다시 긴장했을 때 내가 근엄하게 한마디 했다. “내일 또 합니다. 내일 결석을 하면 큰일 납니다. 엉뚱한 오해를 살 테니까….” 아이들은 화가 나서 발로 책상을 차기도 하고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이튿날, 출근을 했다. 미닫이 교실 문을 열자마자 5000원 짜리 지폐가 내 발등에 떨어졌다. 교실에서 없어진 돈이었다. 아이들의 혹독한 편지글에 견디지 못하고 토해낸 것이다. 교실에 들어와 나는 이 사실을 알렸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다시 A4용지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씩 했다. “선생님, 도둑도 잡았는데 또 무엇을 쓰라고 그러세요.” “이번에는 또 누구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시는 거예요?” “또 도둑을 맞았나요?” 아이들도 악담(惡談)이나 패설(悖說)로 글을 쓰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더욱 엄숙하게 말했다. “어제는 돈을 훔쳐간 ‘도둑놈’에게 편지를 썼지만 오늘은 회개한 ‘도둑님’에게 쓰는 편지글입니다.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느낌대로 솔직하게 써서 작품 게시판에 붙이도록 하세요.” 한참 후에 나는 작품 게시판에서 아이들의 글을 읽으며 경탄하고 말았다. 그렇게 모질고 극악(極惡)했던 아이들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도둑을 용서하는 것이 아닌가. 저들의 그런 아량과 사랑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잘못을 저지른 도둑(?)도 가슴 졸이며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친구에게- 사랑하는 친구야.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이 욕을 해서 미안해.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실수는 할 수는 일이 아니겠니. 더구나 우리들은 어리니까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하여 악마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해. 어쩌면 나도 그랬을지 몰라. 그런데 내 생각만으로 친구에게 마구 욕설을 하고 심한 말을 한 것이 미안하고 후회돼. 앞으로 우리 서로 도우면서 좋은 친구가 되자. 이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우린 이 일을 잊지 않을 거야.
회개한 훌륭한 도둑님에게- 나는 이런 편지를 처음 써봅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께서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하시면서 잘못을 회개하는 사람은 아주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중략)… 사실 나도 3학년 때 집에서 어머니 지갑에서 1000원을 훔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그 일에 대하여 회개한 일이 없습니다. 오늘 집에 가면 용기를 내어 엄마한테 그 때의 일을 다 털어 놓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 못난 000으로부터
그 중에는 제법 수준도 높고 가슴을 찡하게 하는 것도 있었다. 나는 이것을 지저분하다고 하시는 교장선생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꽤 오래도록 게시했다가 나중에는 문집으로 엮어 아이들이 자주 읽게 했다. 이후부터 우리 교실에는 금전사고는 물론,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한 개까지 실물(失物)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청정교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에도, 레터링은 생활지도에 자주 활용됐다. 이를테면 학급에 이유 없이 폭행을 하는 어린이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폭행이나 왕따를 없앴고 국가대항 야구경기에서 뛰어난 재치로 우리나라를 간신히 승리로 이끈 김재박 선수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쓰게 함으로써 애국심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 시국 상황이나 주요 뉴스 꺼리가 있을 때마다 교사의 훈화나 NIE 학습을 하기보다는 레터링을 하면 훨씬 효과를 거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난 2010년 3월 부산에서 발생한 여중생 실종 사건의 경우에도 그것이 살인으로 끝났을 때, 뉴스 매체를 이용한 간접체험보다는 ‘살인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씀으로써 어린이들이 스스로 방어적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의식화할 수 있게 된다. 그 사건이 그냥 망각되지 않도록 살인마와 여중생에게 여러 번 편지를 쓰게 함으로써 각성을 촉구해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지혜와 각오를 각인하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신문에 나온 범인의 사진을 붙이고 편지를 쓰면 더욱 실감할 수 있으며 자극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격(國格)을 세계에 드높인 ‘김연아’ 선수의 경우는 아주 좋은 레터링 교수 · 학습감이 아닐 수 없다. | oram209@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