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기 어려웠던 고전 작품 가운데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고, 다른 하나는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이다. 대학 시절 컴컴한 기숙사 골방에서 지적 허영과 우수(憂愁) 짙은 정조 속에서 읽었는데, 짙은 감동과 공감으로 읽었다는 말은 못 하겠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이 난해했기 때문이다. 그 ‘우수’라는 것도 공연히 잘난 척 내가 만들어낸 감정의 겉멋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너무 어렵고 지루했다. 이 책들을 읽고서 내가 무언가 심오한 것을 깨우쳤다기보다는 책의 후미에 실린 쟁쟁한 학자들의 설명과 해석을 흘금흘금 대조해 가면서, 겨우 억지로 아는 척 해가면서 읽었다는 고백이 오히려 정직하겠다.
그러니까 이 작품들을 근근이 읽어낸 것은 순전히 지적 허영심이었다. 속된 말로 친구들에게 꿀리기 싫어서 읽은 것이다. 나도 그 작품을 완전 독파했노라고 말하기 위해서, 나도 그 작품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읽었다고나 할까. 남들에게 그럴 듯 근사하게 보이려는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읽었으니 분명 오갈 데 없는 허영심이다. 그 허영심을 밑천으로 친구들과 막걸리 집에서 때로는 열기를 띠며, 때로는 시니컬하게 허영의 진수를 노닥거렸다.
이런 지적 허영의 시기는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허영을 권장할 수는 없겠지만, 성장통과 같은 필요악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앎이란 것도 인식 주체가 자기모순을 몇 번씩 거치고 스스로 뒤집으면서 구축하는 것 아니겠는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닌 한, 누가 처음부터 자기 혼돈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혜와 통찰의 자리를 단숨에 장악해 나갈 수 있겠는가.
이런 지적 허영이라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작품 말미에 붙어 있는 ‘작품 해설’이나, 그 작품을 번역한 번역자의 후기였다. 작품의 의미와 주제를 얼마나 명료하게 해석해 보이는지! 나는 그들의 해석 내용에 어떤 저항을 할 틈도 없이, 흡수되어 갔다. 내 관점을 가질 능력도 모자랐지만, 그들의 해설과 해석을 무조건 접수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과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때로는 작품 읽기는 대충대충 하고서, 오히려 ‘작품 해설’ 읽기에 매달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2
근자에 어떤 신학자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관해 쓴 글을 보았다. 그것은 이 작품의 제5장 제2절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같은 책을 읽고서도 나는 왜 이 대목의 기억이 별로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원작품을 다시 찾아보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 대목은 이성의 추종자인 형 이반과 아가페 사랑의 실천자인 동생 알료샤가 신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대목에 삽입된 이야기이다. 이 대목 이야기를 소개한 신학자 정승우 박사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 재판이 잔인하게 자행되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광장에 돌연 그리스도 예수가 나타난다. 예수는 1600년 전에 갈릴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랑 가득한 손길로 군중을 축복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심지어는 죽은 여자 아이를 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교회 당국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다. 교회의 권위를 무시한 예수의 행동은 자칫 교계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행동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선고되었던 것과 비슷한 죄목으로 예수는 교회 당국자들에게 체포된다. 그날 밤, 감옥에 갇힌 예수에게 늙은 종교심문관이 은밀히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아니, 그리스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차피 나는 내일 당신을 이단자로 정죄해서 화형에 처할 작정이니까. 오늘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춘 그자들이 내일이면 내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앞을 다투어 당신의 화형틀에 나뭇가지를 던질 것이오, 대체 당신은 왜 왔소? 당신은 모든 권한을 교회에 일임하지 않았소? 우리는 당신이 이미 이전에 말한 것으로 족하오. 이제 다시 와서 새로운 말을 덧붙일 권한이 당신에게는 없소.”
(정승우,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pp.6~7)
이 이야기가 주는 의미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중세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볼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역사에서 교회 권력이 어떻게 예수의 변혁적인 가르침과 실천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길들여 왔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으로 지적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때 교회가 발휘하는 권력의 성격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해석 권력’이라 부르고 싶다. 해석은 자유이기도 하고, 억압이기도 하다. 누구나 해석을 자신의 내면에서 자유롭게 할 수는 있다. 그래서 해석은 자유이다. 그러나 모든 해석은 개인의 내면에서 나오는 순간 다른 해석과 갈등한다. 해석이 집결하는 사회적 마당에서는 해석들 간에 힘의 대결이 일어난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석이든 해석에는 늘 시비가 따라 붙는다. 해석이 자유롭게 순환되는 사회를 두고 우리는 ‘열린사회’라고 한다.
모든 다른 해석을 장악하고 해석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자이다. 중세도 그러했지만 현대에도 그러하다. 해석이 오로지 하나로 통일된 나라는 독재국가다. 다른 해석이 허용되지 않는 학문은 발전할 수 없다. 이런 권력을 ‘해석 권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정작 예수 본인의 존재보다도 그 예수를 해석하는 교회의 ‘해석 권력’ 앞에 진짜 예수도 속절없이 수난을 겪는 것이다.
늙고 병든 부모를 누가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두고 자식들은 싸운다. 진정한 효도가 무엇인지, 효자 해석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효도에 관한 해석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만, 해석 권력 뒤에는 각자의 현실적 이해가 걸려 있다. 이쯤 되면 ‘해석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고민이 등장한다.
3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사 중에 자신의 말을 꺼낼 때 꼭 이런 전제를 다는 분이 있다. “내 말이 꼭 맞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틀리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해석을 독점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해석을 독점하면 금방 교조주의로 굳어 버리고 만다. 그런 사람은 알고 보면 외로움을 자초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화법에서는 말을 할 때는 “You 메시지*로 말하지 말고, I 메시지**로 말하라”라는 격률이 있지 아니한가.
해석권력을 굳이 대단한 권력자들의 것으로만 생각할 일도 아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해석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교사가 행사하는 해석권력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내 신념이 중요하다고 해서, 내가 믿는 정의가 지당하다고 해서, 해석을 독점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무서운 것은 정의를 독점하면 해석을 독점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해석권력이 절대화 되면 ‘마녀사냥’ 같은 반대편 죽이기 현상이 나타난다. 해석권력을 바르게 행사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절대적 해석권력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지혜도 중요하다. 그래서 다시 독서가 중요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누군가 나의 이 글을 읽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어보려고 다시 펴드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단순한 독서 권장이 아니라, 각자의 해석 권력을 당당히 행사해 보라는 뜻에서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아니 꼭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학자나 비평가의 해석 권력에 조금이라도 저항해 보고 싶은 마음의 지점을 마련해 보시라는 뜻이다. 바로 그 지점이 ‘나의 독서’가 탄생하는 지점이다. 해석은 권력이다. | 경인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