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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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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달에서 피는 꽃

아이들을 위해 많은 수업 준비를 하지만 내 마음처럼 아이들이 따라와 주지 않는다. 그때마다 아이들을 혼내주고 싶기도 하고 좌절감에 빠지지만 결코 이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다. 내가 먼저 그들에게 서서히 다가간다면 그들도 나에게 마음을 열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힘을 내본다.

선생님, 당뇨예요?
오후 1시에 ‘키움반’1) 선생님들이 회의를 했다. 학교에서 문제아들만을 데리고 하루 종일 생활지도에다 학습지도까지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수고가 매우 놀랍다. 비록 일정한 월급을 받고 하는 일이긴 하지만 여느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회의 중에 학년별로 담당하고 있는 키움반의 실태를 공개하고 그에 대한 대처방법이나 지원, 협력 방안을 공유하고 정보를 교환한다.
오후에 세 아이(주동, 모건, 민조(가명))가 왔다. ‘민조가 와서 문제가 되겠구나’ 하고 예상했더니 여지없이 학습 분위기는 붕괴되고 말았다.
내가 옆에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함을 치며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엉겨 붙어서 장난을 친다.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약을 올리듯이 히죽히죽 웃으며 능글거리는그를 보기 좋게 한 대 때려주면 속이 시원할 것만 같은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녀석은 나의 그런 약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조용히 좀 있으라고 했더니 그는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 면서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아동학대!”라고 하며 엄지와 검지로 카메라 파인더를 만들어 사진 찍는 흉내를 냈다.
첫째 시간에는 그리기를 했다. 내가 모델이 되고 아이들이 나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민조는 책상에 포복상태로 엎드려 있다가 혼자 크게 웃어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어깨를 흔들며 낄낄거리고 웃다가도 흥분하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다른 아이의 머리를 감싸 안고 방해를 한다.
옆에 있던 아이(모건)가 응수를 하기라도 하면 더욱 신이 나서 교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만다. 화가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라 때려주고 싶지만 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민조는 30여 분 동안 계속 웃으며 소리치고 옆에 아이를 방해하면서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거의 장난질이고 광란의 페스티벌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내 얼굴을 빠끔히 들여다보면서 “참 못생겼다. 콧구멍이 삐뚤어졌어. 할아버지 얼굴을 아저씨로 만들어줄까?…” 하고 뇌까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녀석이 뜬금없이 나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선생님 당뇨에요?”
나는 깜짝 놀랐다. 실제로 나는 20여 년간 당뇨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이
어떻게 나의 지병을 알았을까. 나는 한동안 당혹감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의 남다른 감각, 혹은 예지(銳智)(?), 아니면 기지(機智)(?)에 놀랐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경악하고 말았다. 작품이 나와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름살, 머리가 볼품없이 벗겨진 것이며 당뇨로 두 볼이 쏙 파인 것, 노령(老齡)으로 쳐진 눈두덩이, 입가에 선명한 고양이 주름, 자주 찡그려서 생긴 미간(眉間)의 11자 주름살, 힘없는 머리털...
외형도 그러려니와 전체적인 이미지를 너무도 잘 그린 작품이었다. 대상의 내재적(內在的) 느낌까지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나는 새삼 그가 천재가 아닐까 하고 엉뚱한 상념에 빠졌다.
천재들이 가지고 있는 부적응,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환경에 대한 저항,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기발(奇拔)한 발상을 모두 표출할 수 없는 안타까움, 자신을 인정해주고 수용해주지 않는 주변.
이런 것들의 복합된 심리적인 저항의 표출을 현실은 ADHD2)라는 이름으로 그를 병자 취급하면서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이상아(異常兒)로 별견시(瞥見視)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의 작품을 응시하면서 나는 문득 불운(不運)의 화가 ‘고흐’를 떠올렸다. 내가 지금 미래의 세계적인 화가를 감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모른다. 그런 아이와 내가 운명적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는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좀 더 면밀히 관찰해야 할 아이지만 병원에 간다고 하면서 자주 결석을 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왜 나만 시켜요?
시간이 되자 세 아이(주동, 모건, 민조)와 함께 훈창(1학년)이 미리 와 있었다. 민조는 마구 떠들다가 병원에 가야한다고 하면서 저 혼자 나가버렸다.
훈창은 그의 어머니가 상담이 필요하다고 Wee Class를 찾아와 부탁한 아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도 그 어머니는 아들이 자꾸 이상행동을 한다고 상담을 요청했다.
최근에는 어머니들이 신문, 잡지, 인터넷에 자주 나오는 각종 심리검사지를 나름대로 활용해 보고 그 결과에 대해 과민한 나머지 자녀들의 사소한 문제에도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거시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미시적(微視的)으로 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연상화 학습을 시작했다. 모건은 1분도 안돼 다 했다. 그는 오래 생각하는 것과 글쓰기를 매우 혐오한다. 마침 이젤이 들어와서 걸레로 먼지를 닦으라고 했더니 ‘왜 나만 일을 하느냐’고 하면서 불평을 한다. 그래도 계속 그 일을 시켰더니 점점 화를 내기 시작했다. “봉사하는 것도 중요한 공부”라고 설득을 하니까 그는 마침내 눈물을 머금고 책상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모건은 학습을 마칠 때까지 책상에 엎드려 있고 주동은 정철의 <이고 진 저 늙은이>를 거뜬히 암기했다. 잘했다고 칭찬을 하면서 음료수를 주니까 더욱 열심이었다. 그동안 칭찬에 매우 목말랐었나 보다.

일어탁수 (一魚濁水)
아이들(민조, 주동, 모건)이 왔다. 목요일은 7교시까지 있어 3시가 넘어야 온다. 오랜만에 민재가 왔다.
그리고 민조가 왔다. 그가 오면 실내 분위기는 금세 뒤죽박죽이 된다. 일어탁수(一魚濁水, 물고기 한 마리가 큰 물을 흐리게 한다는 뜻으로 한 사람의 악행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그 해를 받게 되는 것을 비유)가 딱 맞는 말이다. 오늘은 무슨 카드를 한 보따리 가지고 와서 다른 아이들의 학습 분위기를 여지없이 흐려놓고 주위를 산만하게 한다.
약속한 대로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잠시라도 그를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달래고 달래서 그림을 그렸다.
“빨리 해요. 왜 그렇게 느려요.”
그는 계속 서두르며 짜증을 냈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 초상화를 그린다고 하면 좋아하는데 그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겨우 완성되었을 때 작품 아래에다 ‘천재 화가 민조, 사랑한다.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라고 써 주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민조, 그는 무엇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문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오지 말았으면…
오늘은 금요일이라서 아이들이 모두 영어 공부를 하기 때문에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민조 혼자만 와서 또 말썽을 피운다.
상담자가 감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만 나는 그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적이 많다. 그가 오기만 하면 실내는 난장판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같이 혼자 있을 때 무언가 얘기를 해보려고 했지만 응하지 않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언제쯤 한 번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칭찬 · 격려 · 보상 · 사랑 … 무엇이 약이 될 수 있을까
오늘은 ‘시장 보기’를 했다. 아이들로 하여금 일(work)에 대해 집중력을 기르고 관심을 유도해 보기도 하고 앞으로 구매한 물건을 이용해서 학습의 강화(强化)를 해볼 생각이었다.
마켓에서는 기호(嗜好)식품을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다.
나는 과자나 기호식품이 학습이나 행동 강화에 중요한 매개(媒介)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먹는 것으로는 잠시 마음을 달랠 수 있을진 몰라도 행동수정까지는 어려울 것 같았다. 먹으면서 장난을 치니까 분위기는 더욱 산만해졌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칭찬 · 격려 · 사랑 · 무엇이 저 아이들의 약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것들도 상대방이 최소한의 수용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무조건적인 칭찬이나 격려는 바람직한 행동수정(Behavior Modification)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가슴에 이는 먹구름
오늘도 세 명(주동, 모건, 민조)이 왔다. 비교적 표정이 밝다. 나는 미리 민조와 모건을 따로 앉혔다. 두 사람을 떼어 놓았더니 분위기가 조금은 안정되었다.
첫 시간, 그동안은 도형 자료를 가지고 연상화를 그렸는데 오늘부터는 추상형(비구상) 자료를 활용하기로 했다. 이 자료를 통해 아이들의 의식 속에 무엇이 잠재되어 있는가를 발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빨리하는 사람은 역시 모건이었다. 그에게서 연상화 학습은 언제나 단숨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끝난다. 그것이 그에게는 어느새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수학은 제법 하는 편이지만 국어는 아직도 오자(誤字)가 많다.
역시 민조의 작품은 남달랐다. 오늘은 집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매미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날아가는 동작까지 표현했다. 여느 아이들의 발상과는 아주 달랐다. 그림을 그리다가 종종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나는 계속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무언의 칭찬을 보냈다.
그런데 오늘은 주동이 말썽을 피운다. 그는 화가 나면 거의 이성을 잃는다. 무엇에 심통이 났는지 계속 혼자서 누군가를 저주하듯이 중얼거린다. 수학문제도 아무렇게나 하고 그림도 그리지 않고 완전히 삐쳐 있다. 틀린 수학문제를 자세히 가르치려고 해도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언가에 분개하고 있다. 짐작으로는 내가 민조에게 칭찬을 해줘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칭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오늘도 자기 말고 남에게 칭찬하는 것을 거의 병적으로 싫어한 나머지 증오심으로 바뀐 것 같다. 인사도 하지 않고 문을 부서져라 닫고 사라진다. 학습 분위기가 좋아졌었는데 이 녀석 때문에 다시 내 마음에 먹구름이 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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