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터넷 공간에서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과격한 의사표현을 일삼는 사람인데, 실제로 만나서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 오프라인 공간으로 나오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경우를 더러 확인하게 된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아주 모욕적인 비방, 험담으로 악플 댓글을 상습적으로 달아대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실제 회의장이나 토론장에서는 제대로 나서서 말 한마디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좀 우습지 않은가. 그러니 이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악플 공격을 당한다고 절대로 자살 같은 것을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큰소리치기는 ‘목욕탕에서 혼자 큰소리치기’와 비슷한 심리적 기제를 가진다. 구체적 상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에 별 부담이 없다. 뭐라고 한들 당장 쫓아올 염려도 없다. 더러는 단순하기도 하고 더러는 비겁하기도 하다. 책임의식 같은 것은 아예 없는 족속이다. 그러니 이런 인간들이 해대는 악플에 상처받지 않도록 자기 최면을 거는 것도 중요하다. 어쨌든 디지털 사이버 공간에서는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활개를 치다가 막상 실제로 상대를 만나면 생생하게 주고받는 토론으로 맞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컴퓨터 앞에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일방적 소통을 하는 데만 익숙해져 왔으니, 그것이 어찌 실제로 내공을 쌓은 대화적 능력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실제 상황이라는 것이 약간은 두렵고 부자연스럽고 거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도 일종의 자폐 증후로 볼 수 있겠다. 자식을 멀리 이국에 공부시키러 보내고 그 뒷바라지 때문에 아내까지 보내고, 혼자 살아가는 ‘기러기 아빠’들의 심리 가운데도 이런 경향이 있다고 한다. 평상시 가족들을 그리워하다가도 막상 방학이나 휴가를 맞아 아내와 아들이 일시 귀국할라치면, 무언가 불안하고 거북한 심리 상태를 일시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간에 부지런히 메일 보내고, 전화하고, 스마트폰의 최신 통신 방식으로 감정과 기분을 수시로 주고받으며 지내왔는데도, 막상 만나게 된다니 부자연스럽고 불안한 심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떨어져 있는 상태로 지속되어 온 안정감’이 깨어지는 데서 오는 불안정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개인의 인격으로 만나고 소통하는 데는 ‘몸’으로 느끼고 전하는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첨단 디지털 매체들로 인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되어 간다. 그러나 디지털 소통이 아무리 풍성해도, 스마트폰의 소통 기술들이 아무리 세련되고 다채로워도 소통의 푸근함과 온전함을 100%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목마름을 수반한다. 소통이 온존하려면 ‘몸’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그 ‘몸’을 오롯이 대신하는 것이 ‘손’이다.
2. 한국 사람들의 이별 감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비 나리는 고모령>이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이 노래는 1948년에 가수 현인이 불러서 크게 히트했다. 일제 강점기에 징병이나 징용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의 이별 장소였던 대구 인근의 고모령(顧母嶺) 고개를 소재로 지은 노래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잡은 손을 놓는 것, 바로 이 순간이 이별의 극한점이다. 손(몸)이 서로 떨어져 갈라지는 지점은 심리적으로 이별을 느끼는 극한의 지점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 대목에서 ‘손’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이별은 어떠했을까. 서로가 마음의 곡진함을 마침내 다 전하지 못해 허망함이 더욱 아프게 차올랐으리라. 이별도 일종의 소통이다. 보통 소통이 아니라 감정의 고조가 극한에 이르는 그런 소통이다. 진정성 이외는 다른 그 어떤 것도 헤집고 들 수 없는 그런 소통의 장면이다. 이때의 ‘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이별의 말들을 제압하는 이별 감정의 실체가 아니겠는가. 이별도 소통의 한 장면이라면, 말이 없어도 ‘손’으로 모든 것이 순정하게 전해지는 그런 소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별과 대척되는 자리에 ‘상봉’이 있다. 개인과 개인의 소통(personal communication) 중에 오래 헤어졌던 친지와 다시 만나게 되는 상봉이야말로 극적인 감회가 무한정 고조되는 소통이다. 이런 상봉에서 감정을 어떻게 소통한단 말인가. 그것은 ‘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발현될 수 없는 소통이다. 그렇다. 만나는 순간 두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꼭 붙잡는다. 그리고 운다. 상대를 확인하는 마음, 그리고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는 심리의 공유가 이렇게 두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감싸 안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소통의 장면을 남북 이산가족 찾기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다.
3. 손은 몸 전체를 표상한다. 손에는 온 몸의 신경이 모여 있다. 그래서 손에 침을 놓는 수지침만으로도 몸 구석구석의 아픈 부분을 찾아간다. 그만큼 손은 몸 전체와 소통을 해내는 역할을 한다. 손이 붓는 것은 몸이 붓는 것이고 손을 떠는 것은 신경계에 조화가 깨진 것을 알리는 것이다. 손은 단순히 몸을 표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손금으로 그 몸의 운명까지도 예견하려 한다. 요컨대 손으로 하는 소통은 곧 온몸으로 하는 소통과 다를 바 없다. 손은 말보다 더 직접적인 호소력을 지닌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아날로그의 소통력이라 부르고 싶다. 악수를 대신할 말이 마땅히 있을까. 악수하는 순간 주어지는 손아귀의 힘이라든지, 손을 잡고 흔드는 시간이라든지, 악수하면서 허리를 구부리는 정도라든지 등등 이런 것을 온전하게 다 담보해 줄 말이 있을까. 더구나 어떤 디지털 전화기가 이런 자질구레한 것까지를 모두 섬세히 챙겨서 소통의 질을 담보해 줄 수 있을까. 두 손을 열심히 비비는 아부의 소통은 그것을 대체할 마땅한 디지털 통신 방식을 찾기 어렵다. 아부의 소통이야말로 손과 몸으로 연출하는 초월적 직관의 소통을 만들어 낸다. 손 비비는 아부를 권장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손(몸)이 갖는 소통의 힘이 이렇듯 막강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한다. 이런 약속은 다른 소통 방식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 사이버 공간에서 공인인증서로 전자계약을 하여 효율적인 거래 소통을 하였다고 하자. 이런 방식이 모든 소통에서 반드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소통에 사용하는 ‘손’은 몸을 대표하는 것이다. 예컨대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는 것은 상대의 몸을 나에게 묶어둔다는 상징적 행위로서, 매우 강력한 맹세이다. 그뿐인가. 손을 동원한 소통 가운데 가장 엽기적이고도 섬뜩한 것은 손가락을 절단하여 어떤 결의를 공유하는 것이다. 어떤 디지털 소통이 이런 손의 소통을 대신할까. 손은 사랑과 평화의 소통에 참여하여 이미 사회문화적 기표가 되기도 한다. 스님들이 두 손 모아 합장(合掌)을 하여 예를 표하고, 기독교인들은 두 손을 꼭 쥐고 기도하기도 한다. 이때의 손은 무엇이란 말인가. 4. 첨단의 정보통신 기술들은 빠른 속도로 우리들에게 디지털 소통을 강권한다. 디지털 소통의 반대쪽에 ‘손의 소통’이 있다. 손의 소통은 아날로그 소통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빠른 소통과 편한 소통은 디지털 소통이 감당할 것이다. 아름다운 소통을 추구하려거든 아날로그 소통의 묘미를 애써 몸으로 체득할 일이다. 뇌 과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의 왼쪽 뇌는 이성과 논리를 관장하고, 오른쪽 뇌는 감성과 정서를 담당한다. 그런데 우리 신체는 교차적으로 작동한단다. 즉 오른손은 왼쪽 뇌와 통하고, 왼손은 오른쪽 뇌와 통한단다. 그래서 남녀가 데이트할 때는 가급적 왼손을 잡으라고 한다. 아날로그 소통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문득 이런 영상 광고 하나를 본듯하다. 새로운 첨단 디지털 통신 기술 개발에 성공한 연구원들이 성공의 감격을 하이파이브로 하며 파안대소한다. 손으로 소통하는 즐거움이란 사람을 사람으로 사귀는 데서 얻는 즐거움이다. 바라옵건대 손을 자주 사용하세요! | 경인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