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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문학인가

최근 학교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각계각층에서 그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인문학’ 교육도 그 대안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인문학이 소위 ‘인성교육’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아’로 지목받는 학생이 과연 도덕과 훈육으로 순치될 수 있을까?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 인성교육보다는 인문학의 본령을 되찾아 인문교육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지금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겠다. 인문교육의 어떤 특성이 이를 가능하게 할까?

최근 학교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각계각층에서 그 해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인문학’ 교육도 그 대안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인문학이 소위 ‘인성교육’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아’로 지목받는 학생이 과연 도덕과 훈육으로 순치될 수 있을까?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 인성교육보다는 인문학의 본령을 되찾아 인문교육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지금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겠다. 인문교육의 어떤 특성이 이를 가능하게 할까? 인문학(humanities)은 사전적으로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을 뜻하지만, 고대 로마의 키케로가 처음 사용한 ‘인문학(humanitas)’이란 용어는 ‘인간다움을 지향하는 학문’을 뜻한다. 그는 이 용어를 고대 그리스의 ‘paidea(교육)’에서 착안하여 당시 노예계급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시민계급, 즉 ‘자유인’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교양교육’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이로써 인문학은 ‘자유(libertas)’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모든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인간의 품격과 자질에 관련된 사항을 교육할 수 있는 토대를 얻게 되었다.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기초교육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교양학(artes liberales)의 성격을 띠게 됐고, 그러면서 ‘인간을 자유인으로 키우기 위한 교양교육’이 인문학의 본령이 되었다.

인간다움과 자유로움은 인문학을 받치는 두 축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서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는 외부의 모든 조건과 세력에 저항하여 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확장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성찰(省察)의 학이면서 자율(自律)의 학이다. 인문학의 성찰적 기능은 개인과 사회에 대해 반성하여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모색하는가 하면, 그 자율적 기능은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과 사회가 자립할 수 있는 방향을 제안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성찰이고 자율인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그에 따른 ‘자존감의 보존’이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인문학의 전제이고 목표다. ‘자기’는 사랑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이 전제가 흔들리고 목표가 흐려질 경우 인문학은 길을 잃는다. 인간은 사랑과 존중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현실은 이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찰은 단순한 반성이 아니다. 인문학적인 성찰에서는 ‘이해’가 먼저다. 왜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게 되었나, 왜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하게 되었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고전적인 문학작품들은 대개가 작품 속에서 비행을 저지르는 주인공이 처한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문제의 소지를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서 찾는다. 비행의 원인을 진단하는 일이 선행하고, 그 처방이 따른다. ‘나’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문학은 가르친다. 따라서 잘못도 단지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심리학 교수가 비뚤어진 주인공 윌을 향해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를 반복해서 외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인문학의 치유기능이 여기서 나타난다.

인문학의 성찰에는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선행하지만 그게 목표는 아니다. ‘지식’이 인문학의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행위한다. 인간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고자 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로 인해 일그러진 개인과 사회에게 지금까지 있어온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잘즈만(M. Salzman)은 소설 <새들은 새장 안에서도 노래한다>에서 청소년 재소자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 “여기에 갇혀 있는 사람 이외의 너는 누구지?” 비행 청소년에게 ‘비행’은 그의 일부가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내부에는 ‘비행을 저지르지 않는 다른 그’가 도사리고 있다. 그 ‘다른 나’를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 인문학의 임무다. 인문교육은 ‘새로운 나’를 발굴하여 그 ‘나’가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도모한다. 삶의 원동력이 나의 밖이 아니라 나의 안에서 흘러나올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리하여 진실로 홀로 설 수 있는 나의 출현을 소망한다.

그래서 숱한 인문 교양서적은 ‘자기 찾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기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는 길을 찾고, 자신의 취향을 찾고, 자신이 지향하고 싶은 가치를 찾는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의 자기 찾기는 전문적인 기술이나 직업적인 소양을 기르는 지식이 아니라 이를 수단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과 관계한다. 따라서 자기 찾기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조건과 방향을 겨냥한다. 삶의 맛은 지식에서 오지 않는다. 지식은 삶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인문학은 삶의 과정 자체에 접근한다. 인문학은 어디에서 삶의 참맛을 느껴야 하는지에 눈뜨게 한다. 교양학으로서의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삶의 도구에 관련된 지식의 교육이 아니라 곤경 속에서도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지혜의 교육이다. 지금 우리의 입시위주 교육에서 학교는 ‘좋은 대학 입학’만이 학습의 목적이 되어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진정한 교양의 효과적인 수단을 파괴하는 당시의 교육 행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에게 최후의 목적지만을 제시하면서 그리로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온갖 교육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인문학은 인간이 추구하고 돌아가야 할 고향, 어머니다. 어머니로서의 인문학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보듬는 최후의 보루이다. 내가 입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다. 모든 이해타산을 넘어 순수하게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원천이다. 지식이 아니라 삶 자체를 오롯이 떠받들고 있는 주춧돌이다. 보에시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철학의 여신’을 등장시켜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상처를 치유 받는다. 거기서 그는 철학을 “나의 보모(保姆)”라고 칭한다. 인문학은 모든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아이’를 일깨우고 보살피는 어머니다. 아이를 위해 어머니가 일어서야 한다. 지금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떠나고 있다. 그 빈자리를 인문학이 메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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