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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복지재단의 김혜영 국제사회복지사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거인이라고 부른다. 어릴 때 사고로 척추장애를 가지게 되어 134㎝에서 키가 멈춰버렸지만 그녀는 가정형편, 신체조건, 경제적 어려움 등의 환경에 갇히지 않았다. 오히려 “결핍의 힘을 젊은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당당히 외치며 전 세계를 무대로 사회복지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2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상을 수상했고, 지난 1월에는 tvN의 ‘김미경 쇼’에 출연해 젊은이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그녀, 고난에 굴하지 않고 꿈을 향해 돌진하여 마침내 가슴 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김해영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국제사회복지사로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나요?

2012년 10월부터 밀알복지재단의 아프리카권역본부의 본부장으로 파견되어 현재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밀알복지재단은 아프리카 약 10여 개 나라에서 희망사업과 복지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말라위에서는 장애인재활센터운영,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의료지원, 그 외 각 나라별로 초등학교 지원사업 등이 진행되면서 약 3000여 명의 초등학생들이 혜택을 받고 있어요. 이 과정에서 희망사업부 본부장, 아프리카권역 본부장으로 파견되어 말라위를 비롯해 탄자니아, 우간다, 지부티, 그리고 잔지바르 등의 나라들을 돌면서 희망사업지 신규사업개발, 조사, 연구 등을 하고 있어요. 아울러 재단의 해외 NGO들과의 네트워크 개발과 교류 등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데 조만간 브룬디, 르완다, 남수단 등을 조사할 계획도 갖고 있죠.

어릴 적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경북 상주에서 2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났어요. 가난한 집인데다가 아버지는 제가 여자아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드셨어요. 술에 취한 아버지가 실수로 어린 나를 던지는 바람에 척추장애를 입게 되었죠. 7살 때는 어머니 역시 머리를 다쳐서 약 10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요. 어머니의 질환으로 인해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린 동생들을 보호하고, 집안 살림을 하면서 보냈어요. 초등학교를 마치고 한 달 후 아버지가 자살하셨는데, 그 후 6개월 정도 있다가 집에서 쫓겨나서 가사도우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평탄치 않은 시간이었던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복지사로서 귀감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데요, 신체적 장애와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15살 때 사고의 전환을 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있었어요.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독서에 빠져들었어요. 당시는 정말 죽고 싶다는 마음이 지배하던 때였는데 “내가 죽어 버리면 이 아름다운 세상을 못 볼 것이 아닌가, 죽어버리면 내가 손해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죽을 만큼 열심히 살다가 죽자! 그러면 사람 된 책임을 한 것이다”라고 믿고 실천하기 시작했어요.
또 하나는 나의 장애, 가난, 부모님의 불행 등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어요. 그리고 나의 나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죠. 신이 나를 용서했다면, 나도 나를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이 논리대로 이 사회와 사람들, 부모님을 용서하면서 내 삶의 기초를 다시 세울 수 있었는데, 사회복지사가 된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선택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같아요.

아프리카 보츠와나를 선택해 가게 된 이유와 그곳에서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대학진학에 두 차례 실패했는데 계속된 실패를 되풀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아마도 경쟁사회에서 끊임없이 경쟁하며 사는 일에 지쳤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거창고교의 직업선택 십계명을 읽게 되었는데 그 순간 봉사의 길에 눈을 뜬 것 같아요. 이후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지원했어요. 마침 보츠와나에서 편물기술자를 구하던 터라 그곳에 가게 됐죠. 당시에 저는 편물기술자로서 성공을 하고 있었거든요. 아프리카 청소년들에게 편물기술을 가르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단순하게 1년간 봉사활동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었죠.
보츠와나에서는 처음 계획했던 1년이 14년이 되면서 편물기술자에서 전문사회개발교육자로 거듭날 수 있었고,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장애인, 기술자, 못생긴 여자 등으로 낙인 되었지만, 보츠와나에서의 14년은 나에게 여성, 인간, 사람다움 등 인생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정체성을 확정하는 시기가 되었죠. 또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그 무엇보다도 우선할 수 없는 숭고한 존재라는 종교적 깨달음도 얻었어요.

그러던 중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한 것으로 압니다. 갑자기 공부를 결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2004년 9월, 맨해튼에 위치한 나약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서 2008년 5월에 졸업했고, 2009년 8월 컬럼비아대 사회복지대학원 석사향상반(Advanced Standing Course)에 입학해서 2010년 5월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보츠와나에서의 사회교육개발사업의 경험을 이론화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요. 보츠와나에서 직업학교를 운영하면서 경험한 사회복지 및 교육사업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어요. 또 교육에 관해서는, 한국보다 미국이 나에게는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해 뉴욕으로 갔죠. 선 경험 후 교육인 셈이죠.
오랜 시간 봉사만 하던 봉사단원에게 미국의 비싼 학비와 생활비는 큰 부담이지 않았을까요?
전적으로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휴스턴의 서울침례교회에서 매달 500달러씩 생활비로 보내줬고, 남가주의 밀알선교단에서 매월 300달러씩 장학금을 보내줬어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그 돈으로는 차비 밖에 내지 못했어요. 집세는 주인집에서 거의 실비로 받았고, 부식은 같은 집의 룸메이트가 거의 제공해줬어요. 미국 유학을 공짜로 한 셈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도와주어서 가능했는데, 일일이 다 표현할 수 없이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정형화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준 인생의 멘토가 있을까요?
큰 스승으로 마음에 새겨진 분이 있어요. 약 29년간 멘토가 되어 주신 故 강대근 선생님이세요. 평생에 대여섯 번 잠시 만난 것이 전부였지만 내 인생에 큰 그림자가 되어주신 분이에요. 16살 때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나의 처지를 비관하며 편지를 보냈을 때 이런 답장이 왔어요. “해영아,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다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란다. 네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배워라.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워라.”
이 답장은 어린 내게 학교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게 했고, 내 처지를 비관하는 마음을 물리치게 했어요. 어쩌면 나는 강 선생님의 삶을 따라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체계적인 학업을 마친 후 다시 찾은 아프리카,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로 돌아온 지 한 달이 안 돼 ‘내가 아프리카를 잘못 알고 있었구나’, ‘내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구나’ 깨달았어요. 내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는 1990~2003년까지의 보츠와나가 전부였거든요. 2012년 9월에 말라위 현장조사팀을 만들고, 현장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상당부분 활용할 수 있었어요. 공부한 보람을 많이 느꼈죠. 덕분에 조사 후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1 년간 1억 원을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의 학교는 어떤 모습인가요?
아프리카의 초등학교는 한국이나 선진국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열악해요. 우간다는 학생 175명당 교과서 한 권으로 공부하고 있어요. 학교 외형으로 보면 오지나 깊은 시골로 갈수록 교도소처럼 생기거나 닭장처럼 생긴 건물이 일반적이고요. 정식 교사는 구하기 어렵고, 있다고 해도 60~70명씩 흙바닥에 앉혀놓고 생기 없이 가르치는 교사들이 일반적이죠. 물론 남수단과 같이 더 오지로 가면 커다란 망고나무 밑에 돌덩어리 몇 개 놓고 가르치고 배우기도 해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과정으로 보려고 노력해요. 조금 늦을 뿐 아프리카는 깨어나고 있거든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조금씩 더 나은 삶도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또 찾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이 같은 환경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학교에 가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죠. 그리고 망고나무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행복을 느끼죠. 이것이 내가 느끼는 아프리카에요.

한국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사람이 삶의 희망이 되고 근간이 되길 바라요. 학벌, 능력, 재능, 실력, 배경 등 비본질적인 요소들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사람 또는 사람됨의 가치는 전도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옷이 사람보다 앞서니까 누구나 다 좋은 옷만 입으려고 하듯 말이죠. 이러한 현상은 사람됨의 가치를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고 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죠. 비본질적인 요소들 속에 가려진 사람됨의 참된 가치를 볼 수 있는 교사와 학생들이 많아지길 희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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