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ant의 순수이성비판
‘지혜’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哲學)’의 哲은 ‘밝을 철’이다. ‘언동이 지혜롭고 총명하다’는 이야기이다. 서경(書經)에서는 도리에 밝은 사람을 ‘敷求哲人(부구철인)’이라 했다. philosophy 역시 ‘사랑하다(philo-)’와 ‘지혜(sophia)’가 합쳐져 ‘지혜를 사랑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공자, 맹자 등을 배우는 이유는 그들의 앎(知)을 토대로 지혜(智)로워지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철학은 모호하고 거대 담론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우리의 이야기를 좀 더 풍부하게 해줄 수 있는 “지혜로운 학문”으로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철학(哲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시대이다.
칸트가 현대에게 주려고 하는 메시지 무엇일까?
1)정언명법 :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
우리는 시내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야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나도 피곤하기에 양보하는 것이 싫지만 ‘노인 공경’이라는 도덕규칙 때문에 양보를 한다. 이는 Kant의 정언명령 중 내면적 선의지를 중시한 의무론적 윤리설에 따른 행동이다.
칸트는 정언명법(定言明法, Imperativ)을 통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는 준엄한 명령을 내렸다. 칸트의 정언명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정언명법은 ‘자신의 행위 준칙이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 법칙이 되라’는 것이다. 이는 남의 입장에 서서 행위하라(역지사지)는 공정성의 형식적 원리이다. 두 번째 정언명법은 ‘사람을 물건 즉,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내용상의 원리이다. 이렇듯 Kant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 법칙인 정언명법을 통해 모든 인간이 목적의 주체로서 공존하는 사회 체제를 강조한다.
‘나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처럼 확대해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준칙이 정언명법이다. 반면에 가언명법(假言命法)은 올바른 윤리가 될 수 없다. “네가 이렇게 해주면 내가 널 더 좋아할께”는 올바르지 못하다. 모든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해 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숭고하고 고귀한 사랑이다.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보자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의 욕구 충족의 대상 즉, 수단이 되어서는 않된다. 남녀간의 사랑이 서로가 서로에게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한다면 그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2) 순수이성비판 :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이성’으로 판단하라
사랑은 지성(머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감성이 빠진 지성만의 사랑은 허무하고 공허하며, 지성이 없는 감성만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칸트는 ‘이성과 경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은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이성’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성은 “시초도 없고 무한한 것”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사랑, 이별처럼 말이다. 이런 한계 때문에 우리는 윤리법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경험만으로 인식하는 것은 정당한가? 경험적인 것은 실증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만의 감각만으로 처리한 판단은 실수투성이가 될 수 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변할 수 있다. 사랑, 이별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감성만으로 인식한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받아들인 그 대상을 지성으로 판단하고 추론해야한다는 것이다. 감성만으로 대상을 인식하면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지성만으로 대상을 인식한다면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비합리적인 것, 우연적인 것을 모두 배척하고 오로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것만을 강조한 합리주의’와 ‘모든 지식의 근원은 경험에 있다며 경험적 인식을 중요시한 경험주의’를 종합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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