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존경을 받던 거대한 존재 이순신(칼의 노래)보다 ‘저절로, 어쩔 수 없이 개가 된’ 보리가 되어 세상을 보라고 권한다. 한국 문단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김훈의 수많은 작품들 중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책 ‘개’는 우리 일상의 슬픔과 기쁨 그리고 평범한 우리 이웃의 모습이 흥건히 묻어있다. 인간처럼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이용하여 세상을 배우고 이해하려고 애쓴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녀석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들이 마음에 안 드는 아이 험담을 늘어놓는다. “선생님도 우리 입장이 되어보면, 우리가 왜 쟤를 싫어하는지 알걸요?”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보자며 말미를 준다. “걔는요, 문제가 뭔 줄 알아요? 온갖 이쁜 척을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셀카를 찍는다는 거죠. 페북에 올려서 관심 받으려는 관종이라니까요”, “우리한테 지적질을 한다니까요. 주제를 몰라요”…. 치명적 사유는 없다. 다들 자기들 입장과 기준에서만 한 사람을 재단하고 몰아붙일 뿐. 자기들 입맛에 안 맞는 아이는 눈빛 교환 몇 번으로 그 아이만 제외하고 연합해버린다. 그리고는 서둘러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시켜버리는 요즘 아이들이다. “아이고, 욘석들아. 안 이쁘면 셀카도 못찍냐? 그럼 난 얼굴 가리고 다닐까? 페북하면 다 관종이냐? 그럼 이 세상 사람들 다 관종이냐?”…. 내 기준에서 너희도 다 똑같다. 그러니 우리 서로 편 가르지 말고 이해하면서 살자꾸나.
태어나보니 그런 걸 어쩌랴. 유전적으로 환경적으로 물려받은 성향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랴. 처음부터 다르게 태어났으니,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말이다. 김훈의 ‘개’는 인간의 삶을 방해하는 문자, 매체들에서 벗어나 ‘개’처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세상과 마주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출발한 작품이다.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기는 소나 닭이나 물고기나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태어나보니 돼지이고, 태어나보니 사람이고, 태어나보니 암놈이거나 수놈인 것이다.
김훈의 ‘개’는 태어나보니 진돗개 수놈이었던, ‘보리’가 자신의 삶을 철저히 개의 입장에서 기록한 장편소설이다. 작가 특유의 ‘버석거릴 정도로 냉철한 문체로’ 그저 담담하게 개의 발바닥으로 경험한 사람 사는 모습을 개의 입장에서 기록했다. 보리의 기록은 마치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 일기를 엿보는 듯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서 묻고, 개의 방식으로 답을 찾는다. 지독하리만큼 감정이 배재된 ‘질문과 답’은 전혀 유치하지 않고, 무겁지 않고, 뻔하지 않다. 개를 통해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애쓰지도 않고, 신파처럼 찔끔거리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실에 기반한 묘사와 서술로 장황하지 않고 압축적으로 전개되는 보리의 기록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도 ‘개’처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온몸으로 어쩔 수 없이 다르게 생겨먹은 사람들을 이해하면서 살아보자고 말할 뿐이다.
개 노릇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아. 더 중요한 공부는 사람들의 마음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야. 아주 어려운 공부지. 눈치가 모자라면 생각도 짧아져. 사람들은 대체로 눈치가 모자라.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을 치사하고 비겁하게 여기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거야. 사람들도 개처럼 눈치를 잘 살펴야 해. 남들이 슬퍼하고 있는지, 분해하고 있는지, 배고파하고 있는지, 외로워하고 있는지, 사랑받고 싶어 하는지, 지겨워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척 보고 알아차릴 수 있어야해.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야. 사람이 주는 밥을 먹어가며 또 때로는 매를 맞고 밥도 굶어가면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해. 그게 개의 도리이고 그게 개의 공부야.
‘살아있는 것들은 기어이, 스스로 아름다운 운명을 완성한다’는 김훈의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처럼 우리 아이들도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들의 삶을 아름답게 완성했으면 좋겠다. 세상에 살아있는 생명의 기운은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삶의 본질은 같다. 끼리끼리 연합해서 타인을 밟지 말고, 다름의 미학을 인정하며 ‘따로 또 같이’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며 삶을 살아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