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해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멀리서 바라보는 에베레스트와 그 벼랑에 달라붙어 몸으로 느끼는 에베레스트는 전혀 다른 산인 것처럼 말이다. 상황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온몸으로 보고 들었던 자들만이 세상의 문제들을 자기 문제로 삼을 수 있으며 끝내는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대학』에 보면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는 말이 나온다. ‘마음이 그곳에 없으면 뚫어져라 봐도 보이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도 들리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시(視)’와 ‘청(聽)’은 의도를 가지고 애써 보고 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동적으로 보이는 걸 보거나 들리는 걸 듣는 자연 반사적 행위는 ‘견(見)’과 ‘문(聞)’으로 표현한다. 때문에 ‘주견(注見)’이나 ‘발시(發視)’라는 단어는 불가능하다. ‘주시(注視)’와 ‘발견(發見)’이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애써 귀 기울여 듣는다’는 표현은 ‘경청(傾聽)’이라 해야지 ‘경문(傾聞)’이라 할 순 없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대학』의 내용을 찬찬히 음미해 보자. 엄청난 주의를 기울여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보고 들었어야 할 것들을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이 그 안에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각이나 청각 같은 관능적 감각들은 이들 감각들을 최종적으로 통솔하는 마음이 떠나가는 순간 블랙 아웃된다. 이렇게 마음의 스위치가 꺼지게 되면 음식을 먹고 있으면서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한다. 말하자면 모든 감각들이 의식에까지 진출할 수 없도록 봉쇄된 채로 방치되는 것이다.
마음을 담아서 보고 들으며 마침내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를 체험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체험이 나의 삶 전체와 구체적으로 접속되는 순간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 앙가주망(engagement), 즉 실존적 ‘참여’가 발생한다. 우리는 세상 안으로 참여해 들어갈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의 문제들을 나의 문제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에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않아 체험도 참여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에겐 좁디좁은 자아가 그가 가진 세상의 전부가 된다.
【원문】
子曰, “不觀高崖, 何以知顚墜之患, 不臨深淵, 何以知沒溺之患, 不觀巨海, 何以知風波之患?”
「省心篇(上)성심편(상)」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