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해보고 또 의심해 보고 더 의심해보고…. 데카르트는 끊임없이 의심해 보아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을 진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절대적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방법적 회의(methodical doubt)라고 한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워도 “그 어떤 것이 참일까?”를 생각하고 있는 ‘나’는 절대적으로 의심할 수 없다. 결국,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고 존재(sum)하는 것은 ‘생각하는 나(Cogito, ergo sum)’이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후 17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적 지성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15세기 중세의 신본주의에서 벗어나 이성(logos) 중심주의의 깃발을 세운 사람이 데카르트(Descartes)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나무에 따르면 뿌리는 자연학, 줄기는 수학과 철학, 맨 위가 신학으로서 신본주의의 대표적 위상을 들어낸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와 반대의 진리나무를 세운다. 뿌리가 형이상학, 줄기가 자연학, 맨 위가 의학ㆍ기계학ㆍ도덕학으로 보았다. 이제까지 ‘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신’을 자연과학처럼 이성의 확실성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의 냉철함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데카르트가 보내는 메시지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주장한 바처럼 인간은 이성적 동물인 것이다.
끊임없이 의심해 보아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 ‘진리’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추구하고자 한 사람이다. 우연적인 것이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본 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이성’의 존귀성에 대해 절대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즉, 진리란 시대나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영원한 절대적인 것이라는 것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이런 절대적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을 ‘회의(의심)’으로 보았다. 의심해보고 또 의심해 보고 더 의심해보고…. 이렇게 끊임없이 의심해 보아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을 진리하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방법적 회의(methodical doubt)라고 한다. 플라톤(Platon)의 이데아(Idea)론(6월호 참조)과 같이 그는 이데아 저편에 있는 감각적인 세계, 현실의 세계는 믿을 수 없다고 본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