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골방에 갇힌 책을 다시 광장으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함께 책을 읽는 공독(共讀)은 ‘지식을 쌓는 독서’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독서’를 강조한다. 학교현장에서 ‘함께 읽기’는 각양각색으로 자신을 표출하는 사춘기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다섯 대 수레의 책을 외지만 그 뜻을 물으니 멍하니 알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실학자 유성룡이 그의 저술집 <서애집>에 적은 이 말은 독서가 아니라 ‘지식 욱여넣기’를 하고 있는 한국의 독서 교육에 시사점을 준다. 물론 좋은 글쓰기의 기본이 ‘다독·다작·다상량’이다. 그러나 독서 자체는 절대선이 아니다. 독재자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는 모두 대단한 독서 편력가였다. 누군가는 이들을 “독서가 낳은 괴물”이라고 표현한다. 좋은 독서가 선의 효과를 낳는 것이다.
독서가 낳은 괴물, 히틀러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생각도 비슷하다. “책을 읽은 뒤 최악의 독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최악의 독자라는 것은 약탈을 일삼는 도적과 같다. 결국 그들은 무엇인가 값나가는 것은 없는지 혈안이 되어 책의 이곳저곳을 적당히 훑다가 이윽고 책 속에서 자기 상황에 맞는 것, 지금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것, 도움이 될 법한 도구를 끄집어내 훔친다.” 저자 또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오로지 논술에 ‘써먹을’ 수 있는 지식만을 염탐하도록 교육받는 아이들은 결국 아무리 많은 책을 읽더라도 ‘최악의 독자’로 자라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고의 독자’는 멀리 있지 않다. 독서 행위의 본질에 충실한 것으로 충분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책 읽기’란 낭독이고 대화였다.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은, 누군가와 내용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읽어주는 화자와 들어주는 청자가 있다면, 독서는 책의 내용을 두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낭독이라는 고전적 독서 방식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독서’의 성격을 띤다. 낭독의 오랜 전통은 1000년 이상 우위를 누리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폐기됐다. 누구나 책을 손에 쥘 수 있게 되면서 독서는 내밀한 개인적 행위가 되었다. 이와 함께 독서가의 지위도 책(내용)의 유통자, 해석자에서 소비자로 격하됐다. 미디어학자인 마셜 맥루한은 인쇄술의 발명에 대해 “공유된, 즉 같이 나누는 담론이라는 대화를 포장된 정보, 휴대 가능한 상품으로 번역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소통을 위한 독서, ‘공독’ 골방에 갇힌 책을 다시 광장으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출판가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이런 역사적 맥락 위에 있다. 함께 읽기, ‘공독’(共讀)을 주장하는 신기수 대표(숭례문학당)는 “독서가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지 고민하는 개인적 활동이라면, 공독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사회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면 지식은 널려 있는 시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쌓는 독서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독서라는 것이다. ‘공감’의 민감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읽기의 매력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