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온 국민을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게 했던 이른바 ‘미순이 효순이’ 사건은 나를 처음으로 세상일에 뛰어들게 했다. 학자들이 ‘잘못’을 제기하면 교육행정당국이나 정치권이 적극적 시정을 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의지와 각오도 비장하지 않았다.
대학교수로서 나는 이른바 사회운동이나 정치활동 형태의 사회봉사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 이러한 원칙을 깨고 내가 세상 일의 전면에 나선 적이 딱 한번 있는데 그것은 2005년 초 교과서포럼 창립을 통해서였다. 대학교수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교과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나 자신도 그랬다. 그런데 2002년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살 사건이 나로 하여금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이른바 ‘미순이 효순이’ 사건 직후 촛불시위에 등장한 어린 여학생들의 지독한 반미주의를 보고 나는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때 누군가가 나한테 귀띔을 해 주었다. 요즘 학생들이 사용하는 국사교과서를 한번 읽어보라고 말이다. 과연 내가 정독해 본 당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사실의 차원에서 오류가 많았을 뿐 아니라 이념의 측면에서 너무나 크게 편향되어 있었다. 이런 역사교과서라면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울수록 북한에 동조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싶었다. 촛불시위 현장의 반미구호가 진심이었던 것은 다름아닌 국사교과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여기에 체제나 편집, 문장, 어휘까지 고려한다면 한 나라의 교과서라고 말하기에 참으로 민망했다.
나는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큰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생각을 같이 하는 학자들 몇이 모여 만든 학술운동단체가 바로 교과서포럼이다. 이리저리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니 사단(事端)은 교육부 주도로 2001년에 시작된 제7차 교육과정이었다. 당시는 이른바 진보세력이 집권한 때였다. 제7차 교육과정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학생들은 2·3학년 때 선택과목으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게 되며, 국정이 아닌 검정 교과서를 사용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들 검정 교과서의 대부분이 사실의 왜곡과 더불어 이념적 친북·좌경화가 심했다는 점이고, 금성출판사의 것처럼 학교에서 채택률이 높은 교과서일수록 사정은 더욱 더 그랬다.
교과서포럼이 출범하면서 역사교과서의 여러 가지 문제점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교육당국의 반성과 반응은 기대치를 훨씬 밑돌았다. 게다가 정치권에서는 이 문제를 진보 대 보수라고 하는 이념적 잣대로 환원시켰고, 그 결과 교과서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념갈등으로 변형되었다. 특히 기존 역사학계의 반발이 거셌다. 한편으로 이는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좌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역사인식이 입시(入試)산업에서 강력한 이권(利權)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진보세력과 역사학계의 집중포화 속에 교과서포럼은 친일 및 독재미화 세력으로 간단히 매도되어 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