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이 없는 사람들, 산책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시간과 싸우며 일하는 택배, 퀵 서비스 노동자들, 화물자동차 운전자들, 오랜 장거리 항해에 몸이 매인 선원들, 24시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들, 누군가에게 폭력의 언어로 시달리는 텔레마케팅 종사자들, 그 시달림의 가해자인 각종 스토커들, 어둠 속에서 음습한 익명으로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산책을 잃은 사람들이다. 구금자, 노숙자들도 산책을 잃은 사람들이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명인들도 그러하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의사결정의 스케줄에 밀려가는 CEO들도 산책이 결핍되어 있다.
01 현대인들은 ‘빠른 속도로 살기’를 강박 받는다. 자신들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배경에 자본의 논리가 있는 것도 알기 때문에 또 한 번 힘이 빠진다. 돈을 벌자면 속도에 쫓겨 사는 일쯤은 감내하라.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것, 그것에 떼밀리면서도 이 지점에서 ‘느리게 살기’가 목마른 저항으로 갈구된다. 아무튼 느림에 대한 찬양이 삶에 대한 비판적 통찰로부터 온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데 느리게 살기도 만만치 않다. 느리게 살기가 일종의 유행처럼 되면서 느리게 살기에도 큰돈이 드는 것을 매체들이 다양하게 보여준다. 호반을 배경으로 넓은 뜨락이 주단처럼 깔리고 그 위에 호화로운 별장을 보여준다. 이 정도는 되어야 느리게 살기의 출발점인 양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적지 않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도 이미 ‘느리게 살기’는 속된 욕망의 한 장르처럼 사람들 사이를 스멀스멀 부추기고 다닌다.
느리게 살기의 구체적 실천 방식으로 적합한 것을 추천해 보라. 소박하면서 동시에 얼마간의 거룩함의 정조까지 거느린 ‘느림의 실천’을 추천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누구에게나 부담 없이 쉽게 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산책(散策)’을 추천하고 싶다. 산책의 사전적 의미는 ‘취미 삼아 휴식을 위해서 천천히 걸어 다니는 일’로 되어 있다. 산책, 그 걸음의 행보는 가볍게 보일지 몰라도, 그 의미는 심연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산책은 ‘느린 것’에 입문하기의 처음이고 동시에 끝이다. 산책을 건강 때문에 한다고 하면 그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산책이다. 어쩔 수 없어 몰려서 하는 산책이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산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스스로 찾아서 정신의 자유를 누리는 산책에 있다. 산책으로 인하여 느리게 삼라만상을 발견하고 그들과 느리게 교섭하는 데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산책’은 ‘전원’이라는 공간과 궁합을 이룬다. 사실 전원(田園)이란 ‘밭[田]’과 ‘동산[園]’이란 구체적 자연을 지시하는 말이지만, 현대인들의 마음에는 이상적 공간으로 관념화된 자연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데아(idea)로서의 전원과 산책이란 말이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산책’은 심상치 아니한 의미의 깊이를 가진다고 하겠다.
근자 산책(散策)이라는 말은 그 사용 영역이 넓어졌다. ‘산책’이 들어간 제목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국의 서원 산책’이나 ‘미술관 산책’ 같은 제목은, 특정의 공간을 산책하다는 것이니까 자연스럽게 들린다. ‘산책’이란 글자 그대로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이니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방송 프로그램 제목으로도 ‘역사 산책’ ‘가요 산책’, ‘전통음식 산책’ 등의 이름도 나온다. 처음 들을 때는 좀 어색한 듯했지만, 자꾸 들으니 무리 없이 들린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민속 산책’, ‘교양 산책’, ‘음악 산책’ ‘철학 산책’ 등도 나온다. 급기야 ‘마음 산책’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바야흐로 오늘날 ‘산책’은 ‘의미론적 진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마음 산책’이야말로 산책의 진수라는 생각도 든다.
02 ‘산책(散策)’에서 ‘산(散)’이란 한자는 ‘흩어질 산’이다. ‘흩다’, ‘헤치다’, ‘풀어놓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산(散)’은 ‘해방(풀려서 놓여나는 것)’의 의미 자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자유’의 뜻까지도 연결되는 것이다. ‘산(散)’의 이러한 뜻에 기대어서 ‘산책’은 일로부터 놓여나는 것, 매이어 있던 생각으로부터 놓여나는 것, 시간에 구속당하지 아니하는 것, 져야 할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등등의 뜻이 모두 숨어 있게 된다. 달리 목적지가 없이 걷는다는 것도 놓여남의 일종인데, 아는 산책만의 특징이다. 산책에서 목적지가 달리 특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정처 없이 간다는 뜻보다는, 처음 떠난 곳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행정(行程)의 특성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산책(散策)’에서 ‘책(策)’은 ‘채찍’, ‘채찍질하다’, ‘지팡이’ 등의 뜻이 있다. 지팡이는 어딘가를 가고 있는 행보를 표상한다. 산책이란 말이 처음 만들어진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지팡이가 내포하는 길나들이의 의미가 그럴듯하게 산책의 본뜻을 돕는다. 지팡이로 딛는 걸음이라고 해서 이를 굳이 노인의 걸음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저 완만하고 유유자적한 느린 행보라면 모두 ‘산책’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러고 보니 산책은 어린이나 청소년의 행보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삶의 경륜과 인생사 고뇌를 안으로 숙성시킨 사람에게 어울린다. 그래서 산책은 인간 개개인의 존재론적 의미를 드리운다. 여러 무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 혼자이거나 그 혼자를 간섭당하지 않는 상태의 걷기가 산책의 온전한 분위기이다. 그래서 산책의 반대쪽에는 단체로 가는 행군이나 등산 같은 것이 있을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