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라는 말은 항상 나를 살짝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어쩌다가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정식으로 문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렇듯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치약이나 약 상자에 씌어 있는 사용법에서부터 광고 문구에 이르기까지 글자로 씌어 있는 모든 것을 허겁지겁 읽었으며, 특히 소설책이나 시집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일은 아니지만, 지속해서 일기 비슷한 것을 썼다. 내가 문학교육이라는 걸 받았다고 우기자면 아마도 이것이 전부일 것이다. ‘무엇이든 읽기’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쓰기’.
무엇이든 읽기무슨 책이든 다 재미있다고 말했던가? 당연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랬다. 책이든 포장지든 가게 앞에 붙어 있는 간판이든, 글자로 씌여 있는 모든 것이 재밌었다. 처음으로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책은 아마도 교과서일 것이다. 수업시간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들여다봐야 하고, 선생님이 읽으라는 부분을 읽어야 하고, 읽으면서 외워야 하고, 외운 것을 시험까지 봐야 하니까.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독서는 자발적이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물론 기계적으로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재미나 그밖에 아무런 보상도 없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흡수하기는 힘들다. 문학적 독서는 더더욱 그렇다. 학문을 연구하고 익히기 위한 독서는 아마도 체계적으로 그리고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서 읽는 게 더 효과적이고 유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나 시를 읽는 방식은 순간적인 흥미나 직관, 혹은 우연을 따라가야 한다. 그게 더 좋은 방식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설이나 시가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다가오지 않는다니 무슨 말인가?
오래전 <카피캣(1995, 존 아미엘 감독)>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장면 대부분을 잊었지만, 오직 한 장면은 또렷이 기억한다. 주인공이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현관문 밖으로 단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해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범죄심리학자이며 자신이 분석한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 중이고, 실제로 피습을 당한 경험도 있다. 그래서 일종의 광장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범인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데, 마침 열려 있던 현관문 밖으로 서류가 날아가 버린다. 그녀는 서류를 쫓아가다가 문 앞에서 멈춰 선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그 서류를 주울 수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두려움 때문에 문밖으로 나갈 수 없다. 문턱을 잡고 몸을 구부려 손을 최대한으로 뻗어 보지만 복도에 떨어져 있는 서류에 닿을락 말락 할 뿐이다. 마침내 서류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그녀는 무기력하게 그것을 바라본다.
앞뒤 상황을 훤히 이해할 수 있는 영화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면,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단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하는 그녀를 의지 박약한 무능력자, 패배자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현관문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으려고 할 때 마주하는 어려움은 보통 사람이 4~5m쯤 되는 벽을 기어 올라가서 뛰어내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막막함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의지가 아무 소용도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광장공포증 같은 비합리적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 현관문 밖으로 나가려면, 보통 사람이 현관 밖으로 나가고자 할 때 필요한 의지보다 수십, 수백 배 정도 강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문학이나 예술이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의미를 이해했다. 말은 어렵지만 의미는 단순하다. 내가 아닌 남이 되어 보도록 하는 것. 내가 경험한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을 근거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현실에서는 ‘나의 입장과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친밀해진 관계, 그래서 너와 내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인 사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쉽게 타인의 입장이 되지 못한다. 타인이 ‘되어보려 하기’보다는 재빨리 어떤 범주 속으로 집어넣어 타인을 ‘파악하려 하기’ 마련이다. 문학이나 예술은 나에게 타인이 되어 보는 경험, 낯선 존재가 되어 보는 경험을 허락한다. 소설이나 시가 나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음악이나 미술, 영화 같은 형식은 시각이나 청각 같은 감각적 도구를 사용해서 더 직접적이고, 문학은 언어라는 지적인 도구를 사용하므로 더 간접적일 수 있다. 그 대신 언어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라서 접근하기 쉬운 도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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