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은 동지(冬至)를 지나고 있다. 동지는 어둠이 가장 깊고 가장 길고 가장 무겁게 드리운 밤이 방문하고, 어둠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팥죽 속에 새알을 건져 먹고 있다. 이 밤이 지나면 악귀 같은 어둠은 토끼꼬리 만큼씩 물러설 것이다. 야금야금 빛은 어둠을 살라먹고 조금씩 조금씩 빛을 더 많이 우리 곁으로 가져올 것이다.
팥죽을 먹으며 어둠과 빛은 계속해서 ‘영원회귀(永遠回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밀란 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은 니체의 ‘영원회귀’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릭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9P
이 소설에서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가벼움과 니체의 철학에 등장하는 영원회귀(永遠回歸)의 무거움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자신을 운명이라고 믿는 여자를 부담스러워하며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가벼움을 상징하는 외과의사 토마시, 그를 끝까지 믿는 무거운 여자 테레자가 등장한다. 토마스의 연인이었던 사비나는 토마시처럼 구속받지 않는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예술가이다. 그녀 역시 가벼움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연인 대학교수인 프란츠. 이 네 사람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 체코의 정치적 상황과 함께 잘 드러난다. 사랑이 역사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끝없는 갈등을 통해 거듭된다는 사실과 이것을 알기에는 오랜 시간의 방황이 필요하다는 것을 세월이 지난 뒤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체코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이다. 특히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이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 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이렇게 무거운 정치 상황 속에서 가볍고자 하나, 가벼울 수 없는 외과의사 토마시는 자신을 운명적 사랑이라 믿는 여종업원 테레자와의 만남이 부담스럽지만 결국 무거움과 가벼움 속에서 그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소설을 읽으며 니체에게서 느껴지는 영원회귀(永遠回歸) 사상이 밀란 쿤테라의 글에서는 온전하게 발현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서구적 시간의 화살, 한시성이 더 잘 드러나 보인다. 곳곳에 매력적 은유가 힘을 잃지 않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다. 특히, 토마시가 느낀 테레자에 대한 느낌이 압권이었으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건져 올려졌다가 그의 침대 머리맡에 건져 올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15P
그의 곁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참을 수 없는 우연으로 비쳤던 것이다. 도대체 그녀는 왜 그의 곁에 있는 것일까? 그리도 왜 그녀는 토마시의 침대라는 강변에 접안했던 것일까? 왜 하필이면 다른 여자도 아닌 그녀였을까?/364P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되는 경계를 넘나들며 사는 네 사람의 삶과 사랑을 생각하였다. 내 삶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을 가진 밤과 마주한다. 동지의 밤은 깊고 어둡고 춥지만, 이것은 봄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어둠이 짙으면 밝아오는 아침은 더 찬란한 것이기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테라(이재룡 옮김). 민음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