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게 지내던 직장 동료가 질문을 던졌다. “윤 수석, 어쩌다가 승진을 못 하셨어? 윤 수석 같은 사람이 관리자가 돼야 하는데……”. 격식 없는 술자리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당황했다. 이런 대화는 친분이 있는 경우 조용하게 나눈 적은 있지만,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듣기는 처음이다.
술자리에서 나온 질문이어서 대답할 이유는 없었지만, 지금도 머릿속에 맴돈다. 비슷한 질문은 이미 여러 번 들었다. 후배 중에 아예 “승진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노골적으로 물은 경우도 있다. 대답을 머뭇거리니까 일부 선생님은 “혹시 일부로 승진을 안 하신 것은 아니죠?”라고 되묻기도 한다. 이 날도 질문은 많아지고 답은 없는 상황에서 “수석선생님 같은 분은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해요.”라며 말을 던지는 후배도 있었다. 내가 곤혹스러운 방석에 앉아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위로의 말을 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가 중도에 그만 두는 사람들이 이유를 댄다. 그 중에 나에게 감동을 준 말이 있다. 그것은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이다. 짧지만 내용은 강했다. 스스로 부족했다는 판단이다. 다른 사람이 구차하게 핑계를 대는 것과 대조되어 깊은 울림을 준다.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남기고 싶은 답도 이런 유형이다.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승진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지금 어찌 들으면 구차한 변명이 될 수도 있지만, 해명은 남기고 싶다. 우선 일부로 승진을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처음 교직을 사립학교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공립으로 옮겼다. 공립으로 옮기고 보니 승진의 길목에서 빗질을 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제법 많았다. 그래서 나도 욕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립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현장 연구도 해보고, 입상의 기쁨도 누렸다. 컴퓨터 워드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어렵게 자격증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나 승진의 기준과 시스템은 온전하게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농어촌 점수, 연구학교 근무 경력 등이 그렇다. 나는 공립에 늦게 온 탓에 이런 데서 멀리 있었다. 동료들이 가까운 섬 지역에 같이 가보자는 제의도 있었지만, 늦었다는 핑계로 따라 가지 못했다.
물론 이런 복잡한 사다리를 한번에 건너는 장학사 시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부담은 여전했다. 주변 경험자들을 보니 보통 공부해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한가로운 업무를 맡아야 하고, 학원까지 가서 공부를 해야 했다. 공립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학교 업무를 해내야 하는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내는 영역이었다. 마음은 가득했지만, 결국 시험도 못 봤다.
모든 사회 조직이 그렇듯이 교직에서도 승진은 오르고 싶은 자리다. 간혹 선생님들의 승진에 대한 욕심을 속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동의할 수 없다. 교사도 인간으로 승진에 대한 욕망을 지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그 욕망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얻는 기쁨으로 나타나야 한다. 교사로서 자신의 일에 대해 소신과 자부심을 가지며 헌신하다 승진의 길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직 사회의 승진 욕구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승진에 대한 욕망이 교사의 본분을 망각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탈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교육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상사의 눈치를 보고, 그 사람의 힘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승진은 교육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기준과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지금이야 컴퓨터 워드 시험이 없어졌지만, 그때 컴퓨터 워드 시험을 보면서 생각이 많았다.
승진도 일종의 경쟁이다. 그러다보니 선생님들은 승진하지 못한 것을 패배의 영역으로 읽기도 한다. 경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반드시 승리만 있을까. 아니다. 비록 이기지 못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남과 더불어 배우는 기회를 얻는다.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력의 가치가 있다. 현장 연구 대회 준비와 입상, 그리고 컴퓨터 워드 시험 준비와 합격이 나를 만져주었다. 동료들과 품위 있는 경쟁의 뜀박질도 승리 못지않은 기쁨의 일부분이다.
동료들이 섬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고민을 오래 한 이유가 있다. 나를 짓누르는 선택보다 내게 여유를 줄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 친구들은 고생한 덕에 교감(校監)이 됐다. 그들은 관리자로 후배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물론 나는 교감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아이들과 선생님들과 교감(交感)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삶의 기쁨으로 가르치는 용기를 내고, 학생들을 배움으로 안내한다. 경쟁에서 한발 물러선 여유가 학생들의 마음속에 지성과 감성으로 연결되어 풍요로운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