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지하철을 타는 순간 사람들이 품는 소박한 소망은 무엇일까. 아마도 앉을 자리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당장 빈자리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내가 앉을 자리가 곧 나기를 바란다. 설마 내릴 곳까지 죽 서서 가지는 않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 고매한 인품과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도 지하철을 탈 때, 자리를 기웃거리는 것은 조금도 흠 될 것이 없다. 승용차 없이 버스나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나 역시도 기왕이면 편하게 앉아 갈 수 있기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자리에 대한 이 소박한 기대가 그냥 소박하게만 끝나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기대는 그냥 잠시 품었다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잊어버리는 것이 돼야만 ‘소박한 소망’으로 남는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
여기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달리 달콤한 쾌감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끔찍하고도 유치한 ‘불행의 마음’으로 빠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행복하다는 것이다. 빈자리에 대한 기대를 마음에 두고 있다 보면, 그것이 은근한 ‘집착’으로 슬며시 변한다. 물론 자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일종의 자기기만(自己欺瞞)인 셈이다.
아무튼 빈자리가 곧 날 것으로 예측되는 곳을 부지런히 찾는다. 오감을 넘어서 육감까지 동원해 찾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머지않아 곧 내릴 것 같은 사람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 사람 앞에 ‘틀림없이 내릴 것이라는 모종의 확신’을 갖고 선다. 그가 곧 내릴 사람인 줄을 어떻게 아느냐고? 어찌 그걸 알아서 알겠는가. 자리에 대한 집착이 그런 확신을 만들어 줄 뿐이다. 그것은 나만의 오도된 확신일 뿐, 상대는 내릴 듯 내릴 듯 내리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서 있는 나는 자리에 대한 집착이 더욱 완강해진다. 그만큼 내리지 않는 그가 미워진다. 속으로 온갖 욕을 해준다. ‘눈치도 없는 녀석’, ‘얼굴도 못생겼군’, ‘눈은 단추 구멍만 하고, 옷이라곤 볼품없이도 입었네’ 등 마음속 욕은 끝 간 데가 없다.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화를 낸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절제의 결핍이다. 이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이 불합리한 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태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자리에 앉아서 스마트폰만 열심히 두드리던 그는 전동차가 어떤 역에 머무는 동안 흘깃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더니, 놀란 듯 후다닥 서 있는 나를 밀쳐내며 황급히 뛰쳐나간다. 아마도 내릴 역을 놓치기 직전이었던 듯하다. 그 바람에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난 나를 잠시 힐끗 쳐다보며 내 옆에 서 있던 중년 아줌마가 냉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여기서부터 내 마음속 감정의 나라는 ‘미움의 공화국’을 넘어서서 ‘저주의 왕국’이 돼 버린다. ‘짜식! 계단에 엎어지기라도 해라’,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가다가 전봇대와 박치기해라’, 이런 식의 저주를 마다치 않는다. 자리를 꿰찬 중년 아줌마를 향한 저주도 눌러두지 않는다. ‘잘 먹고 잘살아라!’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망가진 감정에 감금되고 말았는가. 아예 서서 가기를 작정했다면 이렇듯 고약하고 유치한 감정의 지경에 나를 몰아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02
연세의료원 원장을 역임했던 김일순 박사가 쓴 ‘지하철 열차 내에서 서서 가면’이라는 글이 떠오른다. 그는 지하철 열차에서 서서 가면 몇 가지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손잡이를 잡지 않고 서가는 경우 장점은 더욱 커진다고 한다. 특히 나이가 드신 분들에게는 더더욱 유효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물론 당신 자신도 ‘지하철 열차 서서 가기’를 잘 실천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의 지하철 타고 서서 가기의 이점을 조금만 경청해 보자.
첫째는 다리에 힘을 기르게 되는 운동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앉아서 가게 되면 이런 운동 효과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숨 쉬는 운동 외에는 달리 운동이라 할 게 없다. 특히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은 대개 다리의 힘이 약해지고, 아주 고령이 되면 걷지를 못하게 되는데, 지하철에서 다리 힘을 길러 줄 것을 당부한다.
둘째는 몸의 균형 감각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지하철에서 서서 가되 될 수 있는 대로 손잡이를 잡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몸의 균형 잡기 운동 효과를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아지면 몸의 균형 잡기가 힘들어진다. 신체 나이를 측정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눈감고 한 다리 들고 오래 서 있기’ 등을 하는데, 이는 모두 신체 균형감각 측정이라 할 수 있다. 김 박사는 다른 어떤 곳도 지하철에서처럼 균형감각을 길러주는 데는 별로 없다고 한다. 노인의 사망원인 중에 많은 경우가 낙상에 의한 것인데, 이는 균형감각 기능이 저하되는 데서 오는 것임을 지적하며, 미리 그렇게 되기 전에 균형감각을 길러 둘 것을 강조한다.
셋째는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해 준다는 점을 알려 준다. 지하철에서 서서 가려면 몸을 곧게 세워야 하는데, 이것이 바른 자세 만들기를 돕는다. 특히 구부러진 자세를 교정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리에 앉아 가는 사람들의 온갖 비뚤어지고 구부러지고 꼬이고 젖혀지고 고개 숙인 자세 등을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가 간다.
넷째는 심리적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앉을 자리가 없어도 심리적으로 전혀 위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리가 있는데도 앉지 않겠다는 마음을 지키다 보면 자신의 강건한 의지에 대해 긍정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있는 자리를 양보한다는 마음으로 서 있으면, 어떤 정신적 여유로움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김 박사 자신도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잡지 않고 서서 가기 시작한 지 여러 해 됐다고 말한다. 관절이나 심장이 약한 분들이 아니라면 이렇게 운동하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03
김 박사는 건강정보를 전해 주는 것 같지만, 이분의 말씀이 건강정보 이상의 지혜를 품고 있음을 알겠다. 그의 말씀은 매우 의미 있는 ‘행복론’으로도 들린다. 마음을 비우라는 둥, 자아와 진지하게 대면하라는 둥 추상적인 담론으로서의 ‘행복론’이 아니라, 너무도 실천적인 ‘행복론’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행복의 나라로 올라가고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자리에 앉고 싶은 기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낙원에 있을 수도 있고 지옥에 있을 수도 있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서서 가도 행복할 수 있다. 이 지혜를 모르면 행복을 구한답시고 집착으로 흐른다. 마음 안에 불행 경고등이 있어서 집착을 제어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의 철학이 자란다는 생각이 든다.
논어 계씨(季氏) 편에 보면, 앎 또는 배움의 등급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은 상등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다음이며, 우둔하지만 애써 배우는 사람은 또 그다음이다. 우둔하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등이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여기에서 배움과 앎이란 그냥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문맥으로 보나 일반 이치로 보나 그렇다. 김 박사의 말씀을 나는 제대로 배운 것일까, 배워서 알았으면 실천을 해야 할 터인데 말이다. 배우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