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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서러운 금강초롱꽃

김민철의 야생화 이야기

초가을 경기도 가평 화악산에 오르면 곳곳에 보라색 보석을 박아놓은 듯하다. 한두 송이가 아니라 눈길 닿는 곳마다 있고, 아예 밭처럼 군락을 이룬 곳도 있다. 금강초롱꽃 이다. 꽃이 줄기 끝부터 피기 시작해 아래로 내려가면서 차례로 피는데, 진짜 보라색 초롱을 들고 있는 것 같다. 꽃송이 곡선은 청자에서 흐르는 유려한 선을 닮았다. 꽃을 들어 속을 들여다보니 세 갈래로 갈라진 암술이 수줍은 듯 흔들린다.


금강초롱꽃은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의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 우리나라 특산 식물이다. 1909년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발견해 금강초롱꽃이란 이름이 붙었다. 높은 산 중에서도 꼭대기 부근에서만 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알현’할 수 있는 꽃이다. 설악산·오대산에서도 볼 수 있지만 금강초롱하면 화악산 금강초롱이다. 화악산 금강초롱이 가장 색도 선명하고 곱다. 화악산 금강초롱이 국내 제일인 ‘미스 금강초롱’인 것이다.



야생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1~2년에 한 번씩은 금강초롱을 보러 화악산에 오른다. 물론 금강초롱이 필 무렵 화악산에서는 꽃이 닻처럼 생긴 닻꽃, 진범, 과남풀 등 다른 예쁜 꽃들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야생화 모임인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야사모)’의 사이트 모델 꽃도 금강초롱꽃이다. 필자도 한동안 화악산 금강초롱꽃을 노트북 바탕화면으로 썼다. 하여튼 금강초롱꽃은 쉽게 보기 어렵지만 우리 야생화의 매력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꽃이라 할 수 있다. 드물게 꽃색이 하얀 흰금강초롱꽃도 있다.


그런데 금강초롱꽃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름에 서글픈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국명’과 전 세계 공통으로 쓰는 ‘학명’이 있다. 학명은 국제적인 명명규약에 따라 처음 발표하는 학자가 정하는데 라틴어로 속명과 종명을 표기하고, 종명 다음에 생물을 처음 분류한 사람 이름을 넣는 경우가 많다. 금강초롱꽃의 학명은 ‘Hanabusaya asiatica (Nakai) Nakai’다.



금강초롱꽃처럼 우리나라 자생식물 중에는 유난히 학명에 ‘나카이(Nakai)’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개나리는 한국 특산종인데도 학명이 ‘Forsythia koreana Nakai ’다. 나카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일본의 식물분류학자였다. 그는 동경제대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1909년 스승의 권유로 한반도 식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체계적으로 식물을 연구해 분류할 학자가 없었다. 나카이는 1942년까지 17차례에 걸쳐 한반도 곳곳을 답사해 식물들을 채집했다. 그가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을 집대성해 펴낸 책 <조선삼림식물편>은 한반도 식물 연구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이에 따라 개나리는 물론 할미꽃·벌개미취·개느삼·각시투구꽃 등 한국 특산종에 대거 나카이 이름이 들어갔다. 세계적으로 1속 1종밖에 없는 희귀종인 미선나무에도, 토종 라일락인 수수꽃다리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한국의 자생식물 4,000여 종 가운데 16%의 학명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카이는 한반도 식물을 분류해 학명을 정했지만 학문적 양심을 지킨 학자는 아니었다. 금강초롱을 처음 분류한 사람도 나카이였다. 나카이가 한반도 식물을 조사할 때 연구비와 인력을 지원한 사람이 조선에 파견된 초대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타다 (花房義質)였다. 나카이는 금강초롱 속명에 하나부사 이름을 붙여 학명으로 등록했다. 한반도 특산종인데도 종명을 ‘아시아(asiatica)’로 정해 아시아 전역에서 자라는 것처럼 흐려놓기까지 했다. 나카이는 동경식물학회가 발행한 <식물학잡지> 1911년 4월호에서 “이 신발견의 세계적 진식물(珍植物)을 하나부사 자작에게 바쳐 길이 그 공을 보존해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금강초롱을 하나부사의 한자 이름대로 화방초(花房草)라 부르기도 했다.



울릉도 특산인 섬초롱꽃은 연한 자주색 바탕에 짙은 반점이 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섬초롱꽃의 학명은 ‘Campanula takesimana Nakai’ 다. 종명을 독도의 일본명인 ‘다케시마’로 해놓은 것이다. 역시 울릉도 특산인 섬단풍나무도 종명에 다케시마가 들어있다.


국가생물정보시스템 검색만으로 12종에서 다케시마라는 글자를 찾을 수 있었다. 국내 식물 이름에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로, 할 수만 있다면 바로잡 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학명은 국제적 약속이어서 한번 정해지면 선취권을 인정해 우리가 임의로 바꿀 수 없다. 북한도 우리처럼 화가 났는지 금강초롱꽃 속명을 ‘하나부 사야’ 대신 ‘금강사니아(Keumkangsania)’로 바꾸어 사용하지만 국제적으로 전혀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식물도 감정이 있다면 금강초롱꽃이나 섬초롱꽃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하듯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우리 특산 식물을 분류하는 일은 다소 늦어졌더라도 우리 학자들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꽃에 어엿한 우리식 이름을 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금강초롱꽃은 변함없이 피고 있지만 불편한 학명을 사실상 영속적으로 써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금강초롱꽃과 섬초롱꽃을 주로 다루었지만, 비슷하게 생긴 꽃 중에서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그냥 초롱꽃이다. 초롱꽃도 원래 산자락에서 자라는 야생화였지만 꽃이 예쁜 데다 어느 곳에서나 잘 자라 요즘엔 도심 화단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섬초롱꽃도 어여쁜 자태 때문에 화단에 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초롱꽃은 꽃색이 연둣빛이 도는 엷은 미색이지만, 섬초롱꽃은 꽃잎에 자주색 무늬가 선명한 것이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초롱꽃은 잎과 줄기에 털이 있는데, 섬초롱꽃은 줄기에 거의 털이 없이 매끈하다는 점이다. 잎과 줄기에 털이 있는 것은 추위를 이길 목적 때문이다. 추운 육지에 사는 초롱꽃은 털이 필요하지만 따뜻한 울릉도에 사는 섬초롱꽃은 털이 필요 없었다고 기억하면 쉽다. 섬초롱꽃은 보통 줄기에 자줏빛이 도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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