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역사학자 폴 존슨은 ‘현대’의 시작을 1919년으로 봤다. 이 시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현실’로 증명됐다. 지금이나 그때나 상대성 이론은 너무 어렵지만,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전 인류를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도움만 있다면 인간은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측면에서 현대를 열었다면 인간 심리의 측면에서도 대변혁이 일어났다. 선봉에 선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리비도, 에로스, 타나토스 같은 용어들이 저잣거리에서조차 넘쳐흘렀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구현해 줄 과학기술의 도움만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기 막시즘(Marxism) 또한 힘을 얻었다. 소련공산당의 아버지 레닌은 막시즘의 완성을 위해서 과학기술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다. 그가 사망했을 때 소련은 레닌의 시신을 보존했다. 이는 레닌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두번째 이유가 더 중요했다. 그들은 ‘언젠가 과학기술이 충분히 발전하면’ 레닌을 물리적으로 부활시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밋빛 기대감의 처참한 결말
현대는 이렇게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과 장밋빛 전망과 함께 시작됐다. 하지만 결과는? 낙관의 시대가 도래한 지 채 30년이 지나지 않아 찾아온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인류가 스스로 발전시킨 과학기술로 만들어낸 것은 재생의 도구가 아니었다. 과학기술은 폭약, 독일의 전차군단, 핵폭탄같은 죽음의 도구로 먼저 구현됐다. 이로써 한 사람의 독재자가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는 대량학살의 시대가 찾아 왔다. 대량학살은 과학기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종전 이후로 따지면 70년 정도의 시간이다. 냉전이 오래 지속됐고 이런저런 경제적 위기도 있었으며 계속된 테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1000년 뒤의 인류가 이 시기를 묘사할 때는 ‘대체로 평화의 시기’ 였다고 정리하지 않을까 싶다. 냉전의 끝은 공산주의(혹은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들끼리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전쟁을 한 기록이 없다. 완벽하진 않을지 언정 전체주의는 역사의 정답일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점이다. 약 100년의 평화기가 도래하자 우리는 다시 100년 전의 사고방식에 조금씩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일례로 최근 신드롬 수준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100년 전 과학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낙관을 연상하게 한다. 최근에는 아예 신(神)이 되고자 하 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 책마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저자는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책 제목은 <호모 데우스>다. 이 책은 미래의 인간은 죽음마저 극복함으로써 영생과 만능의 영역으로 진입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을까
까마득한 미래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종종 인류가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최근 개봉한 <발레리안 : 천 개 행성의 도시>라는 영화를 보면 원시 공동체인 진주족은 왕정을, 인간 공동체는 공화정을 택하고 있다. 이는 관객의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왕정은 과거의 유산일 뿐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없 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에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먼 미래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왕정 체제를 그리고 있는 ‘스타워즈’의 세계관이 우리에게 더욱 낯설다.
인간이 과연 그렇게 끊임없이 진보하는 동물인지, 역사는 늘 진보하기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긍정적인 대답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가 역사상 최고로 진보된 과학기술을 향유하고 있는 건 맞지만, 정신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수천 년 전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와 나약함을 기술로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다가 실패하곤 하는 방황의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수많은 장밋빛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든다. 과연 드론은 인간에게 그저 유통기술의 혁명과 변혁을 약속하는 선에서 임무를 끝마칠까? 3D 프린터는 불치병 환자들에게 장기를 제공하고 백신을 생산하는 평화적 존재로만 남을까? 누구나 집에서 핵폭탄을 만들 수 있고, 누구나 드론으로 헤어진 연인의 집을 폭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건 인간이 지금까지 비슷한 종류의 실수를 계속 반복해 왔다는 점이다.
고전이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아직도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과 달리 ‘신이 되자’고 말하는 4차 산업혁명의 정신은 다시금 창세기의 바벨탑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신과 동급이 되려는 인간의 시도는 이미 수천 년 전에도 있었고 이미 수천 년 전에도 처참한 결과를 야기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4차 산업혁명이 내뿜고 있는 환희의 멜로디에서 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을 들었다면 너무 과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장엄하고 웅장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름다운 멜로디에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사람 중에는 600만 명을 학살한 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 을 말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 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