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다. 아니, 세상에 인사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살아가며 경우에 맞게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만약 내가 인사를 하고 상대가 내 인사를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였는지, 상대방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계가 있다면 우리들 모두는 놀랄 것이다.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닌 인사였는데, 그걸 저 사람은 저렇게 기분 나쁘게 받아들 였단 말이야. 아니, 내 인사가 저렇게 건방진 느낌을 주었다는 거야. 아니, 나는 진정을 담아서 말했는데 저 친구에게는 시큰둥 하게 들렸단 말이야. 등등 이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검증해 볼 수도 있다. 근자에 모임에서 받았던 인사 중에 완벽하게 만족스러웠던 인사가 얼마나 되는지를 헤아려 보라. 나라는 존재가 진정으로 미덥게 존중받으면서, 동시에 상대의 인간적 덕성이 자연스럽게 와닿는 그런 인사를 얼마나 받았었는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인사는 이게 문제이고, 저 인사는 저게 문제이고 등등 인사 흠을 잡으려면 한도 끝도 없음을 바로 나 자신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사를 하고도 인사의 효과는커녕 오히려 욕을 먹는 사람이 많다. 하나마나한 인사를 해서 ‘영혼이 없는 인사’라는 핀잔을 듣는다. 인사하는 속내가 너무 뻔히 비쳐 보여서 얄미울 때도 있다. 인사를 너무 이익 추구 전략으로 하면 인사말만 번지레하기 쉽다. 상대도 금방 간파한다. 나를 인성 나쁜 사람으로 파악한다. 내가 약은 만큼 상대도 약다. 인사에 안해도 좋을 말을 해서 다시 사과 인사를 하는 경우는 안타깝다. 상황과 맥락에 맞지 않는 인사를 해서 상대는 물론이고 주위를 민망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인사 능력은 그 사람의 ‘사회화(socialization) 능력’과 비례한다. 인사를 잘하면 이미 그는 ‘사회화’의 능력과 수준이 경지에 달한 것이다. 누가 어느 정도 ‘사회화’되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지금까지 ‘교육받은 능력’을 대변하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인사 능력으로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사회화 지표 같은 것을 개발해 볼 수도 있을 것 이다. 인사는 상대가 나의 사람됨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은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갑자기 인사가 조심스러워지고 부담스러워진다면 응당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20여 년 전에 국립국어연구원과 조선일보사가 공동으로 펴낸 <우리말의 예절 : 화법의 실제와 표준>은 총 430여 페이지 분량의 책인데, 인사말 화법에 관한 것이 거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인사 제대로 잘 하기가 정말 쉽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인사를 할 때, 이런 경우는 이런 인사말, 저런 경우는 저런 인사말을 쓴다는 것을 안다고 인사를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사말에는 그 인사말을 쓰는 사회의 오묘하고 그윽한 문화의 결(texture)이 알게 모르게 다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인사의 본질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인사말을 듣는 상대방이 기분 좋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다. 그냥 비행기를 태우고 아첨의 인사를 해서 기분 좋게 하는 것은 삼류의 인사이다. 상대는 그 자리에서는 잠시 기분 좋아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인사를 들은 상대는 집에 가서 비판한다. “그 사람 너무 가벼워서 못 쓰겠어. 미더운 데가 없어.” 이렇게 되면 인사는 내 인격만 손상된 채, 안 하니만 못한 인사가 된다. 인사는 인사하는 쪽의 인간적 덕성도 함께 묻어 난다. 그러니 쉽지 않다. 물론 인사 받는 사람의 덕성이 자연스럽게 환기될 수 있으면 그것은 좋은 인사이다.
이런 데에 신경 쓰지 않고, 무난하게 쓸 수 있는 인사말이 있다. 이 인사말은 구태여 내 쪽에서 먼저 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가 무어라고 내게 안부를 묻거나 하면, 그 대답이 되는 말씀의 앞머리에 살짝 얹어서 말을 하면 된다. 그것은 ‘덕분에’라는 말이다.
‘덕분에’는 어떤 인사말에 사용해도 조금도 손해 볼 일이 없는 말이다. 인사나 대화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그간에 이 말을 그저 습관적인 상투어처럼 쓰게 되어서, 이 말의 깊은 속뜻을 음미해 볼 여지가 없었다. 정말 괜찮은 말이라면 그 뜻을 다시 살펴보아 좀 더 진정성 있는 말로 재탄생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냥 상투어로 방치하지 말고 말이다. 나를 괜찮은 인간 존재로 만들어 주는 말의 힘이, 바로 이 ‘덕분에’라는 말에 깊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 ‘덕분에’의 힘에 애착을 가지고, 이 말을 각성하여 쓰다 보면, 우리의 덕성(德性)도 고양되리라 생각한다. 아니, 그게 바로 이 말의 힘이다.
‘덕분에’는 ‘덕분(德分)’이라는 한자어에 보조사 ‘에’가 붙어서 된 말이다. 실제로 ‘덕분’이라는 말은 홀로 쓰이기보다는 ‘에’가 붙어서, 즉 ‘덕분에’라는 말로 한 덩어리를 이루어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어에서는 거의 그렇다. ‘덕분’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뜻은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덕분에’라는 말은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 때문에’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덕분’이라는 말의 동의어는 ‘혜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혜택’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데 비해서 ‘덕분’이라는 말은 왠지 막연하고 덜 구체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혜택’은 눈에 보이게 구체적으로 도움받은 내용이 있어야 쓰는 말처럼 인식된다. 반면에 ‘덕분’은 눈에 안 보이는 도움이나 은혜까지도 모두 포함이 되는 것처럼 인식된다. 스승이나 선배로부터 받은 인격적 영향이나, 도덕적 가르침 같은 것은 혜택이라기보다는 덕분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니까 차원으로 보면 ‘덕분’이 ‘혜택’보다는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은혜라 할 수 있다.
‘덕분에’는 인사 대화에서 많이 쓰인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이다. “그 동안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지냈는가?”라고 윗사람이 안부를 물었을 때, “덕분에요”라고 하거나, “네, 선생님 덕분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것 이다. 친구 사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방학 때 여행 간다더니 잘 다녀왔어?” “응, 덕분에 잘 다녀왔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도움을 받은 일이 없더라도 “덕분에”라고 답하는 데에 이 말의 숨은 덕성이 있다. 평상시 상대가 내게 보여주는 일반적인 관심과 배려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은혜가 된다는 인식을 보여 주는 것이니, 어디에나 감사가 충만한 심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해 준 것이 없는데 무슨 ‘내 덕분에’란 말이야. 만약 누가 이렇게 따진다면 그는 참으로 인간관계의 핵심을,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해의 관계로만 파악하는 사람이다. 내 형편과 처지에 그냥 일반적인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의 은혜를 느끼고 너의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마음을 담아내는 인사가 바로 ‘덕분에’인 것이다. ‘덕분에’에 들어 있는 ‘덕(德)’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인사법에서 상대가 지닌 덕을 예찬하고, 그 덕이 나에게까지 미쳐서 나를 이롭게 한다는 인식(‘덕분에’ 인식)은 아름답다. ‘덕의 이념’이 우리 일상의 생활문화로 와 있음을 이 말이 입증한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났을 때, 왕이 맹자에게 묻는다. 그대여 어찌하면 ‘이익 (利)’을 구할 수 있겠는가. 맹자가 대답한다. 왕이시여, 어찌하여 하필이면 ‘이익(利)’을 말하십니까. 이는 사서(四書)의 하나인 ‘맹자(孟子)’ 첫 페이지 첫 구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맹자는 나라 다스리는 근본 이치를 이(利)에서 찾는 왕을 설득한다. 나라 다스리는 중심이 이(利)가 아니고 덕(德)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맹자의 철학이다. ‘덕분에’도 이런 덕의 철학에서부터 발효된 우리의 인간관계 인식론이고, 인간관계에서 덕을 중시하는 우리의 대화철학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을 주고 받는다. SNS(소셜 미디어)로 진화된 수많은 종류의 카드와 연하장이 오간다. 그 안에는 각기 구체적인 인사의 내용이 적히겠지만, 상대의 복을 빌어주고, 상대 덕분에 나도 잘 지낸다는 뜻을 전하도록 하자. ‘너로 인해 내가 행복하다’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자. ‘덕분에’를 마음껏 말하고 전하자. 사실 우리 모두는 상호 ‘덕분에’의 관계로 산다. 누구의 덕으로 사는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모르는 그 누군가의 덕분으로 산다. 만물의 살아가는 원리와 구조도 다 ‘덕분에’의 관계와 구조로 되어 있다. 생태주의 섭리가 이런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