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애니메이션 소재로도 간간이 사용되지만 옛 동화 속에 보면 묘한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름 맞추기다. 특히 난쟁이들이 나오는 유럽의 민담, 그림동화 속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대표 작품이 ‘룸펠슈틸츠헨’이다. 작품 내용은 대강 이렇다.
옛날 어느 마을에 방앗간 주인이 있었는데 주인에게 딸이 한 명 있었다. 방앗간 주인은 우연히 왕과 얘기를 나누다 으스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딸이 짚을 자아 금실을 만들 수 있다고 자랑했다. 마침 왕은 유난히 황금을 좋아했던 터라 당장 딸을 데려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딸이 도착하자 짚이 가득 찬 방으로 들여 보냈다. 이어 아침까지 모든 짚을 금으로 만들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딸은 어이없는 아버지의 너스레에 위기에 처하게 되고 눈물로 밤을 새우게 된다.
그때 웬 난쟁이가 들어와 “왜 그리 슬피 우냐”라며 질문한다. 딸은 짚으로 금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를 털어놓는다. 난쟁이는 “자신이 짚을 금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데 그 후 자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 딸은 “내가 가진 목걸이를 주겠다”라고 말했고 난쟁이는 모든 짚을 자아 금으로 만들어 놓는다. 왕은 금으로 가득한 방을 보고 이튿날도 똑같은 과제를 준다. 다시 난쟁이는 딸의 반지를 받고 짚으로 가득한 방을 금으로 채워놓는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왕은 너무 기뻐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험하겠다”라며 과제를 주고, 딸은 여느 때처럼 난쟁이를 기다린다.
이번에는 난쟁이의 요구가 전혀 달랐다. 딸은 더 이상 줄 것이 없었는데 난쟁이는 딸이 왕과 결혼하면 첫아이를 달라고 요구한다. 딸은 자신이 왕과 결혼할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쟁이의 마지막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난쟁이는 다시 짚을 금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왔다. 왕은 방문을 열어 가득한 금을 보고, 너무 기쁜 나머지 방앗간 딸과의 결혼을 선포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왕비가 된 딸은 첫아이를 낳는다. 그러자 까맣게 잊고 있던 난쟁이가 다시 나타나 약속을 지키라며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말한다. 왕비는 너무 슬퍼 사정 사정을 하고 이를 가엾게 여긴 난쟁이는 “그럼 사흘의 시간을 주지요. 그동안 내 이름을 알아내면 아이 를 데려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3일의 시간 동안 난쟁이는 매일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왕비의 답은 모두 틀린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고 시름에 잠겨 있던 왕비에게 시종이 뛰어와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한다. 숲 가장자리에서 높은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어느 오두막 앞에 불이 피워져 있고, 그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생긴 난쟁이가 춤을 추며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난쟁이는 한쪽 다리를 올리고 춤을 추고 있었는데 이때 그가 부른 노래가 이상하면서도 신기했다고 말한다.
“오늘은 술을 빚고 내일은 빵을 굽자 / 얼마 있으면 왕비의 아기를 갖게 될 몸 / 내이름이 룸펠슈틸츠헨이라는 걸 / 아무도 모르니 얼마나 좋냐”
드디어 난쟁이의 이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왕비는 마지막 3일째 되는 날 찾아온 난쟁이에게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룸펠슈틸츠헨입니다”라고 이름이 불린 순간, 난쟁이는 “악마에게 들었구나, 악마에게 들었구나”라고 말하며 땅 속으로 몸이 들어가며 죽는다.
‘룸펠슈틸츠헨’은 프로이트의 환자가 찾아와 자신의 꿈을 얘기하면서 함께 분석된 후 연구자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사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퍼진 난쟁이 민담에 포함돼 이미 상당한 흥미를 얻고 있던 동화다.
특히 여기서 난쟁이의 이름이 불리는 부분과 난쟁이가 불을 피우고 빵을 굽고 술을 빚었다는 장면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감이 오롯이 드러나는 것으로 ‘부르다-불린다’를 통해 드디어 일대일의 ‘관계’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 김춘수의 시 ‘꽃’에서처럼 누군가를 그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내게 와 드디어 단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고, 그를 고유한 정체성의 한 존재로 인정하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난쟁이는 자기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이 부분에서 당시 유럽 사람들이 난쟁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보인다. 유럽에서 난쟁이는 때로는 도움을 주는 조력자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대체로 마법을 쓰는 자, 사악한 마법사에게 붙들려 일하는 자, 또는 아름다운 보석을 캐고 탐하는 자 등 여러 모습으로 상징 된다. 특히 마법사와 함께 일하고 자신도 마법을 사용하는 자의 이미지가 매우 강해서 때로는 마녀, 악마 등과 동등한 위치를 갖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악마나 마녀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사는 존재들이다. 때문에 자기의 이름이 불렸을 때는 곧 자신의 존재가 들켰음을 의미해 악마성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는 것이 당시 유럽 사람들의 생각으로 보인다. 이름하여 ‘성명마법’이다. 반면 빵을 굽고, 술을 빚는 행위는 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당시 ‘키 작은 사람들’, 즉 현실 속 난쟁이들의 삶을 의미한다. 때로는 마법을 부리는 자로 생각되지만 현실의 난쟁이들은 여전히 ‘일하는 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름 불리기’ 또는 ‘이름 찾기’가 등장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여기서는 이름을 ‘찾는’ 것이 아닌 이름을 ‘잃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자기의 이름을 잃으면 비밀의 마을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후에 평자들에 의해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살아야 하며, 밤이면 불이 켜지는 이곳이 홍등가를 의미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 에게 ‘이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게 하는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림동화 ‘룸펠슈틸츠헨’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아기를 요구한다’, ‘아기를 데려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난쟁이의 악마성과 식인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도 보이지만 사실은 16~18세기까지 유럽 전역에 번졌던 영아 살해 부분을 떠올린다.
동화는 분석과 해석이 다양해
진화심리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는 자신의 책 ‘mother nature’(우리나라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와 있다)에서 ‘모성 본능’의 허구를 매우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어머니에게 당연시되는 ‘모성’은 사실 본능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며, 진화의 역사를 살펴봐도 사실상 ‘본능’이 아닌 ‘선택’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자식들을 모두 건사하고 키워낼 수 없었던 어머니와 가정에서 불가피하게 가장 약하고 어린아이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16세기 이후 유럽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원시 아프리카 부족들에서 일부 보이고 있는) 어머니에 의한 영아 살해 문제는, 그래서 여러 공포와 두려움의 민담과 동화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아기를 데려가는’, ‘아기를 바꿔치기하는’ 난 쟁이, 마녀, 마법사의 이야기를 생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얼마 전 현대창작동화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발견했는데 동화 작가 모리스 센닥의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가 그런 작품이다. 아버지가 멀리 떠나고 혼자 힘든 생활을 꾸려가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 주인공 여자아이의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도 어느 날 동생을 잃고 다른 존재가 아기 구유에 누워 있는 장면이 나 온다.
동화 룸펠슈틸츠헨에 나타난 ‘아기를 요구하는’ 난쟁이도 이런 지역적, 시대적 배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발생학적 측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고, 프로이트의 성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다. 동화를 읽는 재미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다음 회에서는 본격적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룸펠슈틸츠헨’을 살펴보자. 그의 환자 이야기와 함께. 도대체 그의 환자에게 난쟁이와 금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