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성장하는 시기, 그래서 앞날이 기대되는 시기에 문화는 ‘미래’를 말한다.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측면에서만큼은 미래를 낙관할 수 있었던 80년대, 사람들은 ‘아! 대한민국’을 불렀고 ‘서울 서울 서울’을 부르며 힘든 오늘을 달랬다. 오늘은 힘들지만, 내일은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그래도 굳건하게 존재했던 시기였다.
반면 경제가 정체 혹은 후퇴하는 시기에 대중문화는 자꾸만 빛났던 어제를 반추하며 ‘과거’에 천착한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언제부턴가 ‘복고풍’은 일시적인 유행이라기보다는 상시적인 문화코드의 하나로 정착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반추할 과거가 늘어났다는 게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고풍 유행이란 게 반드시 중년이나 노년층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60대~70대는 유튜브라는 최첨단 유행에 마음을 빼앗겨 있다.
왜 우리는 과거를 미화할까
17년 만에 재결성해서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을 이틀간 마비시킨 H.O.T의 팬 대부분은 아직 30~40대에 불과하다. H.O.T보다 먼저 재결성한 라이벌 젝스키스의 팬들 역시 인생을 반추하기에 터무니없이 이른 나이인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20년 전 철없이 ‘오빠’들에 열광할 수 있었던 투명한 날들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사람에겐 누구나 과거를 미화하는 습관이 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조차 걱정거리는 존재함에도,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그땐 다 좋았는데’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뭘까? 대부분의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함께 느끼기 때문이다.
오빠들만 쫓아다니며 하루 온종일 설레도 괜찮았던 10대 소녀들은 어느덧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됐다. 친구들과 매일 같이 술 마시며 소주 몇 병에 밤을 지새워도 삶이 멈춰 있는 것 같았던 20대와는 달리 시간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짐을 늘려 놓는다. 그 짐의 무게는 자꾸만 우리의 인생이 갈수록 힘들게 한다. 그나마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면 버틸 만하겠으나 그런 것도 아니다.
최근 주식시장을 보면 ‘주식은 그래도 사 놓으면 오르잖아’라는 속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지난 10월 말 코스피 지수는 급기야 2000선 아래로 내려앉았다. 2007년 7월 25일 사상 처음으로 코스피가 2000선을 돌파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렸던 게 무려 11년 전이지만, 우리 경제는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며 좀처럼 믿기지 않는 희망을 더듬거리고 있다. 코스피 붕괴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경제적 분석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애널리스트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투자자들이 눈에 보이는 지표보다는 보이지 않는 ‘심리’에 입각해 주식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코스피·코스닥 주요 종목 중에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최근 몇 달 새 주가가 40~50%씩 폭락한 것들이 즐비하다. 재무제표를 보면 아무런 이유도 없어 보인다. 우리 경제가 앞으로 계속 안 좋아질 것이라는 투자자들의 안전지향 심리가 너도 나도 주식을 파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황량해진 K-컬쳐,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듯 올해 한국 문화는 양적·질적 빈곤에 시달렸다. 올해 9월까지 극장에서 흥행한 영화 열 편 중에서 한국영화는 불과 세 편(신과 함께, 독전, 공작)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질적인 측면에서 ‘명작’의 반열에 올릴 만한 영화는 많지 않아 보인다는 게 중론이다.
어엿한 ‘국가산업’으로 자리 잡은 K팝 역시 올해는 주춤거리는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그나마 걸그룹 트와이스의 약진과 함께 JYP엔터테인먼트의 시가총액이 1조 원을 돌파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최근 주식시장 붕괴와 함께 시총도 다시 후퇴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K팝 비즈니스가 알고 보면 얼마나 불확실하고 비가시적인 요소 위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나마 방탄소년단이 더 이상 ‘K팝스타’가 아닌 ‘월드팝스타’로 자리매김했다는 게 올해 문화계에 있었던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침체된 한국시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시장을 목표로 한 이들의 성공은 그 자체로 K팝의 드라마틱한 성공을 재현하는 것 같다.
MP3 기술이 처음으로 나와 음반시장을 초토화시켰던 2000년대 초반, 그땐 K팝이란 말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중 누구도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로 뻗어 나가 빌보드차트 1위를 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 같은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이는 20년 전 그 절망의 시기에 그래도 누군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우리는 전후좌우 어디를 봐도 희망의 요소가 없는 것 같은 2018년의 끝자락에 서 있다.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이 불편하고, 배는 부를지 몰라도 마음은 고프기만 하다. 쉽진 않지만 그래도 애써 내일에 관해 얘기하며, 서로 덕담이라도 한마디 건네 보는 것이야말로 이런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힐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