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가끔 “혹시 여기 갈매나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의아해한다고 했다. 근사한 나무가 아닌데, 어떤 나무인지 한번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나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백석(1912~1996)이 1948년 남한 문단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 ‘남(南)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배우지 못한 시인데, 요즘 고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딸들도 알고 있었다. 이 시는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로 끝난다.
해방 직후 만주를 헤매다 신의주에 도착했을 즈음 쓴 이 시에서 백석은 절망적인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외롭게 눈을 맞고 서 있는 갈매나무로 표현했다. 신경림 시인은 책 <시인을 찾아서>에서 “이 갈매나무야말로 백석의 모든 시에 관통하는 이미지”라고 했다. 갈매나무가 얼마나 대단한 나무이기에 백석이 드물다, 굳다, 정하다 등 형용사를 세 개나 붙였을까. 갈매나무에 대한 관심은 갈매나무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시에서 연상되는 나무는 높은 산 고갯마루에 있을법한 제법 큰 나무지만, 갈매나무는 다 자라도 키가 2~5m인 자그마한 나무다. 암수가 다른 나무인데, 5~6월 작은 황록색 꽃이 피고 가을에 콩알만한 검은 열매가 열린다. 작은 가지 끝이 뾰족한 가시로 변하는 것이 특징이다. 갈매색은 짙은 초록색을 말하는데, 한여름 갈매나무 잎이 진한 초록색이다. 주변에 흔한 나무 중에선 대추나무가 갈매나뭇과이니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갈매나무가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어서 드문 것은 맞다. 수도권 산에서는 보기 힘들고, 설악산·금대봉 등 백두대간 능선이나 물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수목원에도 드물어서 필자도 가는 곳마다 갈매나무 있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있다는 수목원이 거의 없었다.
오산 물향기수목원에 갈매나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반가워 가보았더니 갈매나무와 형제인 참갈매나무가 있었다. 나중에 인천수목원과 전주수목원에서 갈매나무를 보았고, 안면도 수목원에서 참갈매나무·돌갈매나무 등과 함께 많은 갈매나무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백석이 극찬한 갈매나무 막상 만나보니...
갈매나무를 굳고 정한 나무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나무가 구부러져 있는 경우가 많고 가지도 제멋대로 뻗어 그저 꾀죄죄한 잡목의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백석 시의 배경인 한겨울에 전주수목원에서 갈매나무를 보았을 때도 앙상한 가지에 회갈색 수피가 너덜너덜한 것이 깨끗하다는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혹시 백석 시에서처럼 눈이라도 내리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눈이 오지 않았다. <나무가 청춘이다>의 저자 고주환 씨는 “갈매나무는 땔감 말고는 쓸모가 없고, 뾰족한 가시가 달려 그마저도 그리 여의치 않은 나무”라며 “어떤 연유로 백석의 시상에 ‘굳고 정한’ 이미지로 등장하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고 씨처럼 실제로 갈매나무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수형이 늠름한 것도, 꽃이 볼만한 것도, 그렇다고 수피가 예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물을 모르는 채로 궁금할 때가 더 좋은 경우도 있는데 갈매나무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갈매나무와 이름이 비슷한 들메나무가 있는데, 나무 형태가 깔끔하고 곧게 20m까지 자란다. 그래서 백석이 말한 갈매나무가 들메나무가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서울 남산 야생화공원에 가면 곧고 정한 느낌이 나는 들메나무를 볼 수 있다.
깔끔하고 곧은 들메나무의 매력
물론 백석 시에서 갈매나무는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에 따지고 들어가는 것이 우스울지도 모른다. 다만 방대한 음식과 식물 이름을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백석이기에 좀 의아한 것이다. 해방 전후 나무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때여서 백석이 다른 나무를 갈매나무로 혼동했을 수도 있다. 시인 고향(평북 정주. 현재 북한 행정구역상 평북 운전군)에 갈매나무가 자라는 ‘갈매나무고개’가 있다는데 그 고개 갈매나무는 정말 곧고 정한지도 모르겠다.
백석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 내 가슴을 서늘하게 한 것은 갈매나무보다 북한에서 그의 삶이었다. 시에서 보듯 백석은 굳고 정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 시를 쓰기 전에도 ‘모던보이’ 백석은 뭔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가 내선일체를 강요하기 시작했을 때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났다. 백석이 만주로 떠날 때 연인 자야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쓴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이 러브스토리는 나중에 자야 김영한 씨가 쓴 책 <내 사람 백석>에 잘 나와 있다. 김영한 씨는 해방 후 성북동에서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다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를 만들게 했다. 그 당시 자야가 했다는 “1000억 원(당시 대원각 시가)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라는 말이 유명하다.
백석은 해방 후엔 귀국해 북에 남았다. 고향이 그 쪽이라 월북이라기보다는 그냥 잔류였다. 백석은 러시아 문학 번역과 동시(童詩)에 몰두해 북한 체제와도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1957년 북한 문단에서 아동문학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예술성을 강조하다가 계급성과 사상성이 부족하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결국 백석은 1959년 ‘삼수갑산’의 오지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으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유배’를 간 셈이다. 해방 전엔 홀가분한 몸이었으나 그땐 백석에겐 처자식까지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김일성 원수’, ‘한없이 아름다운 공산주의의 노을’ 등 체제를 찬양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1996년 사망할 때까지 37년 동안 양치기로 연명하며 삼수군을 벗어나지 못했고, 1962년 이후 작품 발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일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백석이 동족들에게 더 야만적인 억압을 당하면서 느꼈을 절망감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백석의 북한에서 삶도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스토리다. 다만 그의 시심(詩心)이 37년 동안 작동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언젠가 삼수군 시절 그의 주옥같은 서정을 담은 시들을 대거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