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라면 전쟁이다
경제전쟁. 위기라면 위기고 기회라면 기회다. 일본이 수출을 금지한 반도체 소재 중 상당수는 이미 국내 기업들이 만들고 있다. 다만 삼성전자 등 우리 대기업들이 마뜩잖아서 믿을 수 있는 일본 기업들의 수입선에 의존해왔을 뿐이다. 우리 소재기업들에게는 이들 첨단 소재를 개발·양산할 절호의 기회다. 이번 일로 우리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들이 근본적으로 흔들릴지, 아니면 우리 중견 소재기업들이 제대로 된 양산의 기회를 갖고 급성장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누구의 경제력이 더 강한가?
이 싸움이 ‘경제전쟁’이라면 두 나라 경제규모를 한번 따져보자. 세계 3번째 경제대국(G3)과 싸움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지 가늠해 봐야 한다. 전력 분석. 가장 기본적인 지표는 GDP(그 나라 안에서 1년 동안 얼마나 생산됐는가를 알아보는 지표)다. 우리의 1년 GDP는 1조 6천억 달러 정도 된다. 일본은 5조 1천억 달러다(2018년 기준). 우리의 서너 배가 넘는다. 만약 한나라에서 생산하는 재화가 자전거뿐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자전거 100대를 만들 때, 일본은 3~400대를 만드는 나라다(그만큼 자전거가 팔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GDP 1조 6천억 달러’라는 우리 경제력은 어느 정도일까? 학생들에게 우리 GDP와 러시아의 GDP를 물어보면 십중팔구 러시아가 더 높다고 답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나라와 러시아·이탈리아·캐나다는 GDP가 비슷한 수준이다(우리가 생산하는 자전거와 그 큰 러시아나 캐나다가 생산하는 자전거 대수가 비슷한 셈이다). 우리는 인구가 5천만 명이 넘고 1인당 GDP가 3만 달러가 넘는 이른바 ‘30-50 클럽’ 국가다. ‘30-50클럽’ 국가는 지구상에 6개 나라밖에 없다. 우리 경제력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심지어 호주나 스페인(1조 3천억 달러)보다 GDP가 높은 나라다. 어찌 보면 우리 경제력은 우리 외교력보다 훨씬 세다(너무 억울해하지는 말자. 북한은 자신들의 경제력에 비해 외교력이 지나치게 높지 않는가). 그러니 ‘외교력으로 안 된다면 경제력으로 한판 해보자’는 청년들의 패기 어린 주장이 꼭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 더, 일본은 인구가 1억 2천만 명이 넘는다. 우리 1.2배가 넘는다. 그래서 GDP의 상당수가 내수로 해결이 된다.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15% 정도밖에 안 된다. 반면 우리는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육박한다(자전거 100대 만들어 일본은 15대를 수출하는데 우리는 50대 가까이 수출한다).
수입까지 합치면 우리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홍콩이나 독일밖에 없다. 이렇게 수출 의존도가 높으면서 농산물에서 의류나 플랜트, 나아가 완성차나 반도체 핸드폰까지 수출하는 기술대국은 지금까지 지구상에 독일과 일본, 그리고 한국밖에 없다. 인구가 적은 나라가 선진국만큼 많이 생산을 하다 보니 당연히 수출밖에는 살길이 없었다. 물론 그 시장에 중국이라는 거대 경제대국(G2)이 바짝 쫓아오고 있지만….
일본이 수출 대국이라면 우리는?
일본은 70년대 중반 전 세계 수출의 10%를 차지했다. 하지만 해마다 낮아진다. 이제 3.3%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전 세계 수출의 3%를 차지하니, 수출로 보면 우리는 일본과 비슷한 수준의 무역대국이다(작년 한 해 우리 총 수출액은 6,048억 달러, 일본은 7,384억 달러다). 그런 두 나라가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당연히 피해도 클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오래 가서도 안 된다.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는 매우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다. 보통의 무역보복은 자국에 대해 지나치게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에 대해 수출장벽을 높인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에게 수출을 더 많이 하는 나라다. 우리처럼 수출을 잘하는 나라가 유일하게 30년 넘게 해마다 무역적자를 보는 나라가 일본이다(기름 잔뜩 수입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빼고, 심지어 사우디보다 일본과의 무역적자가 더 크다).
예를 들어 여행수지도 큰 폭의 적자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찾는 것보다, 한국인이 일본을 두 배 이상 찾는다. 이렇게 무역 수지 흑자국가가 ‘보란 듯이’ 무역규제를 시작했다. 장사꾼이 손님에게 성내는 격이다. 누가 봐도 납득이 안 된다.
일본 없는 한국 무역은 가능할까?
그렇다면 일본과 서로 수출을 더 못하도록 규제 장벽을 쌓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수출을 덜 하니, 우리가 유리할까? 우리는 주로 일본으로부터 반도체 소재 부품 등 중간재와 자본재 등 산업재를 수입한다. 전기절연재 등 수많은 화학제품에 사용되면서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에틸렌은 99% 일본산이다. 일본 수입품 중에 과거 코끼리 밥솥 같은 소비재는 이제 10%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일본의 중간재 수입이 막히면, 우리는 당장 이걸 가공해 수출하기가 어려워진다.
반면 우리는 일본에 소비재나 산업재를 수출한다. 얼마든지 다른 데서 수입할 수 있는 (가격은 비싸지겠지만) 제품이 많다. 결과적으로 서로 수출 장벽을 높이면 우리가 더 불리해 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일본에 대한 수출의존도는 빠르게 줄고 있다. 20여 년 전 우리는 일본의 최대수출국이었다. 그러니 우리 경제의 급성장이 일본 경제 덕을 크게 봤다는 주장은 상당 부분 엇나간 것이다. 하지만 2007년 중국이 그 자리를 꿰차면서 1970년 전체 수입에서 40%에 달했던 일본산 수입 비중은 지난해 10%까지 떨어졌다. 한국 총수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도 1973년 38.5%에서 지난해 5.0%로 떨어졌다. 우리는 일본보다 베트남에 수출을 더 많이 한다. 그러니 일본은 이제 우리의 ‘절대 지존’ 무역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이 싸움에서 우리가 질 거라는 예측 역시 꼭 맞은 것이 아니다.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가 이길 것인가?
수치만 놓고 보면 세계 경제 3위와 12위와의 싸움이다. 누가 봐도 빅 매치다. 이 싸움이 빨리 끝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누가 이길 것인가? 예단하기 어렵다. 쉽지 않은 싸움은 분명하다.
19세기 개항 이후 우리와 일본의 격차는 큰 폭으로 벌어졌다. 지금도 일본의 1인당 GDP는 3만 9천 달러, 우리는 3만 1천 달러다. 하지만 일본이 1인당 GDP 3만 달러를 넘어설 때, 우리 GDP는 겨우 8천 달러였다. 무섭게 따라붙었다. 일본이 우리 경제를 견제하려는 속내는 여기서 출발한다.
게다가 한반도 평화시대가 오면 인구 1억에 가까운 거대한 경제대국이 G2 중국과 G3 일본 사이에 만들어진다. 어쩌면 이 싸움은 그 거대한 경제대국으로 가기 위한 변곡점일지 모른다. 정부는 ‘다시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고삐를 단단히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