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가장 인상적인 꽃을 꼽는다면 무엇일까? 서울로 한정해 보면 능소화가 강력한 후보 중 하나일 것 같다. 한여름 서울 시내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데다 주황색 색감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주택가, 공원에서 벽이나 고목 등 다른 물체를 타고 오르면서 나팔 모양 주황색 꽃을 피우는 것이 바로 능소화다. 경부고속도로, 올림픽대로의 방음벽이나 방벽, 남부터미널 외벽에도 능소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흔히 볼 수 있어서 잘 모르는 사람도 꽃 이름을 알면 “아, 이게 능소화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야생화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소화를 알았을 때, 그 색감과 자태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박완서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능소화가 여주인공 현금처럼 ‘팜 파탈(femme fatale)’ 이미지를 갖는 꽃으로 나오는 것을 알고 정말 반가웠다. 이 소설에서 능소화는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기도 하고, ‘장작더미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도 한다. 박완서 소설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꽃을 고르라면 단연 <아주 오래된 농담>에 나오는 능소화다. 그 다음이 <친절한 복희씨>에 나오는 박태기나무꽃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한 꽃, 능소화
<아주 오래된 농담>의 주인공 심영빈은 40대 중반의 성공한 의사다. 영빈이 30여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 유현금을 만나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 뼈대이고, 여기에 여동생 영묘가 재벌가 맏며느리로 시집간 후 남편과 사별하는 과정, 아내가 남편 몰래 태아를 지워가면서 마침내 아들을 얻는 이야기 등이 교차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하굣길에 현금은 느닷없이 공부 잘하는 영빈과 친구 한광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한다.
느네들 둘 다 의사 될 거라면서? 잘났어. 난 훌륭하고 돈도 많이 버는 의사하고 결혼할 건데. 약 오르지롱. 메롱, 하고는 분홍색 혀를 날름 드러내 보이곤 나풀나풀 멀어져 갔다. 영빈은 그녀의 분홍색 혀가 그의 맨몸 곳곳에 도장을 찍고 스쳐 간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스럽고도 감미로운 떨림이었다.
여기서 분홍색 혀는 능소화꽃과 같다. 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이후 현금을 잊지 못한다. 현금은 이층집에 살았는데,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 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로 뒤덮었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그 무렵 그(영빈)는 곧잘 능소화를 타고 이층집 베란다로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창문은 검고 깊은 심연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심연에 다다르지 못했다.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현금도 해마다 여름이면 자기 집에서 피어나던 능소화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현금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능소화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하는 대목이 있다.
“능소화가 만발했을 때 베란다에 서면 마치 내가 마녀가 된 것 같았어. 발밑에서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이 온몸을 핥는 것 같아서 황홀해지곤 했지.”
‘뚝’하고 송이째 떨어지는, 질 때조차도 아름다운 능소화
능소화는 중국 원산인 덩굴성 나무지만 오래전부터 키워와 우리 것이나 다름없는 식물이다. 흡착근을 갖고 있어서 고목, 담장이나 벽을 잘 타고 10m까지 올라간다. 꽃은 7∼8월 피는데, 질 때는 동백꽃처럼, 시들지 않고 싱싱한 상태에서 송이째 뚝뚝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동네의 한 집도 능소화를 키우는데, 한여름 그 집 담장 밑에는 핀 꽃보다 많은 능소화 꽃잎들이 주황색 바다를 이룬다. 담장이나 벽을 타고 올라가는 능소화도 괜찮지만, 고목을 타고 올라가는 능소화가 가장 능소화다운 것 같다.
능소화(凌霄花)의 한자는 능가할 능(凌)에 하늘 소(霄), 꽃 화(花)여서 해석이 만만치 않은 글자 조합이다. ‘하늘 높이 오르며 피는 꽃’이란 뜻이다. 덩굴이 10여m 이상 감고 올라가 하늘을 온통 덮은 것처럼 핀다고 이 같은 이름이 생긴 것 같다.
능소화에는 옛날 임금을 그리워하다 죽은 궁녀에 대한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는데,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승은을 입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임금은 이후로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궁녀는 담장을 서성이며 안타깝게 기다렸지만, 임금은 오지 않았다. 궁녀는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담장 가에 묻혀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는 유언을 남겼다. 궁녀를 묻은 다음, 담장 가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소화’라는 이름을 따서 능소화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능소화는 흔히 양반집에서 심었기 때문에 ‘양반화’라고도 불렀다. 지금도 여름에 전통적인 양반 동네였던 서울 북촌에 가면 이집 저집에 능소화가 만발한 것을 볼 수 있다. 평민 집에서 능소화를 심으면 관아에 불려가 곤장을 맞았다는 얘기도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능소화가 최 참판 댁의 상징으로 나온다. ‘환이 눈앞에 별안간 능소화꽃이 떠오른다. 능소화가 피어 있는 최 참판 댁 담장이 떠오른다’는 대목이 있다.
‘능소화를 집안에서 키우면 좋지 않다’는 말이 있었다. 능소화 꽃가루가 갈고리 같은 구조여서 눈에 들어가면 실명(失明)에 이를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능소화 꽃가루 때문에 시력을 잃을 위험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수백 년 동안 별문제없이 집 안팎에서 자라고 꽃을 피운 것이 가장 강력한 증거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은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연구 결과, 능소화의 꽃가루는 표면이 가시 또는 갈고리 형태가 아닌 매끈한 그물망 모양”이라며 “오해와 소문에 묶여 이 아름다운 여름꽃 능소화가 우리 곁에 가까이 오기까지 기간이 걸린 셈”이라고 말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새로 심은 것 중 미국능소화가 점차 늘고 있다는 점이다. 전에 살던 아파트단지 방음벽에도 능소화를 심었는데, 꽃이 핀 것을 보니 미국능소화였다. 미국능소화는 꽃이 더 빨갛고 꽃통도 훨씬 길쭉하다. 마치 값싼 붉은 립스틱을 잔뜩 바른 것 같다. 그에 비해 능소화는 색깔도 연하면서 더 곱고 꽃모양도 균형이 잘 맞는다. 기왕 심을 거면 미국능소화가 아닌 능소화를 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