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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라이프&여행] 원주 소녀, 김금원의 여행

가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남장한 여성이 등장하곤 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득이하게 남장을 해야 하는 설정이다. 그런 주인공은 남장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행동은 물론 말 하나도 조심스럽다. 우리는 남장을 한 사실이 발각될뻔한 고비를 넘기며 자신이 정한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는 주인공의 열정에 빠지곤 한다.

 

이러한 드라마는 대개 끝이 좋으니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에 대해 안도하지만 돌이켜보면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활동에는 금기로 포장된 갖가지 제약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나이며 성별, 그리고 학력에 따라 혹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요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다. 우리 시대를 몇십 년 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이런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일지 모르겠다.

 

금지된 길 떠나기 위한 '남장'

 

그런데 이러한 드라마나 소설을 볼 때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다행히 몇 개의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그중 흥미로운 인물이 <호동서락기>를 지은 김금원이다. 김금원은 원주에 살던 소녀였는데 자신이 남장했다는 것을 기록에 남겼다. 남장의 이유는 바로 ‘여행’이었다.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이런 목표를 위해 남장을 했다는 게 조금 의아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드라마 속 남장 여성들도 무슨 대단한 일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 입학한다거나 부모 대신 군대에 가는 것이었으니 남자라면 쉽게 이룰 수 있는, 그리고 소원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이 대부분이다.

 

김금원은 14살 되던 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여행을 위해 남장을 했는데 이는 단순히 여행의 편리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조선시대 여성은 ‘여행을 하는 것’만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경국대전>을 보면 이런 조항이 있다. ‘부녀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 사족 부녀로서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러한 법 조항의 배경에는 풍속을 해치거나 사치를 금한다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이런 규정은 조선에 유교적 풍습이 깊어지며 나타난 것이다. 조선 초만 하더라도 부녀가 나라에 큰 행사가 있거나 하면 구경을 다니기도 하고 또 봄에 좋은 경치를 찾아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예법을 어긴다고 보았고 풍속이나 사치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보아 세종 때 금지한 내용이 법전에 실린 것이다.

 

법으로 여성의 여행을 금지한다고 하니 여성들에게는 커다란 제약이 하나 더 생긴 것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 선비들에게 여행은 하나의 교양으로 평가받으며 유행을 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여행기를 읽은 여성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 많은 여성은 자신의 여행에 대한 욕구가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며 마음을 눌러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도 있었으니 바로 김금원이다. 김금원은 자신이 쓴 책에서 여행에 대한 소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가만히 내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실로 다행이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야만인이 사는 곳에 태어나지 않고 우리나라와 같은 문명국에 태어난 것은 더욱 다행이다. 그러나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난 것은 불행이요,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지 못하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것도 불행이다. 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산수(山水)를 즐기는 어진 성품과 눈과 귀로 듣고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어 다만 산수를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고절하게 보고 듣게 해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비록 가난한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문명을 가진 나라에서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고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여느 여성과 달리 자신의 바람을 실행에 옮겼다.

 

기생 집안에서 태어난 굴레

 

그런데 김금원이 이때 서둘러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김금원은 기생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 15세가 되면 기생으로서 삶을 살아야 했던 상황이었으니 이는 또 하나의 굴레를 지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김금원은 금앵이란 기명의 강원감영 관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앵 역시 시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마지막 해인 14살 되던 해, 김금원은 부모에게 허락을 구했다. 조선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하는 곳, 금강산을 다녀오겠다고 한 것이다. 마지못해 딸의 청을 들어준 부모는 안전을 이유로 얼음이 녹은 뒤 떠나라고 했다. 그러나 대저 여행이란 그렇게 기다릴 수는 없는 일, 마음먹은 김에 김금원은 부모를 설득해 원주에서 남쪽인 제천을 먼저 살피는 것으로 타협하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김금원은 제천의 의림지를 시작으로 단양의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그리고 사인암을 보았다. 영춘, 곧 지금의 단양에서는 동굴을 보았으며 청풍의 옥순봉을 보았으니 대략 단양8경을 두루 본 셈이다. 그리고 금강산을 둘러 본 뒤 남쪽으로 관동8경을 살폈다. 이 가운데 총석정을 감명 깊게 보고 원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김금원은 여행의 묘미를 제대로 느꼈다. 제천에서는 물고기를 사서 회를 해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먹을 갈아 시를 짓기도 했다. 또 금강산 장안사에서는 산채가 풍성한 점심상을 대접받기도 했다.

 

 

'금앵'이 돼서도 여정 멈추지 않아

 

여행이 끝나자 김금원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원주 감영의 관기로서 금원이 아닌 ‘금앵’으로 살아간 것이다. 시재가 뛰어났던 김금원, 아니 금앵은 사대부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금원은 김덕희란 양반의 첩이 됐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금원의 여행은 다시 시작됐다. 김덕희를 따라 서울, 그리고 그의 부임지인 의주로 가는 길이 여행 목록에 포함된 것이다. 김덕희가 의주부윤으로 부임하게 되자 김금원은 남편이 생활할 곳을 먼저 본다는 이유를 내세워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둘러보았다. 그리고 2년의 의주 생활이 끝난 뒤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김금원은 김덕희가 한강에 지은 삼호정, 지금의 마포 도화동 인근에 있던 정자를 중심으로 시모임을 만들었다. 동생인 김경춘을 비롯해 김운초, 박죽서, 김경산 등이 참여한 이 모임은 ‘삼호정시사’로 대체로 김금원과 처지가 비슷한 여성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다른 양반 남성 문인들과 교류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책이 바로 <호동서락기>다.

 

<호동서락기>는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김금원이 여행한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호는 제천과 단양 일대를 가리키는 호서지역, 동은 금강산과 관동8경의 관동지역, 서는 평양과 의주를 포함하는 관서지역, 그리고 마지막 낙은 서울의 별칭인 ‘낙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스스로 14살 나이에 떠난 여행과 남편과 함께 부임지로 가는 길의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여행기를 기본으로 하되 각 여행지에서 지은 시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 가운데 김금원이 책을 쓴 이유를 적은 문장이 있다.

 

‘문장으로 써서 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날 금원이 있었음을 알겠는가’

 

곧 글을 써서 자신이 직접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자의식은 책 곳곳에 발현되어 있다. 자신의 호를 ‘금원’으로 지었으니 김금원은 여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또 시문의 수준에 자부심을 가지며 ‘삼호정시사’ 시절 교류하던 남성, 곧 양반들의 시문은 싣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벗의 시문만 담았으니 그의 자신감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의 한계 넘어설 준비는 됐는가

 

이와 같은 그의 삶과 태도를 보면 남장은 우연한 선택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여성의 미덕인 현모와 양처가 비록 가볍게 볼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목표로 삼기는 곤란하다고 할 것이다. 김금원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김금원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다만 지금은 그의 삶이 부럽지 않은 정도가 되었으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할까.

 

그럼에도 김금원에 대해 부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김금원이 둘러본 금강산과 관동팔경 중 일부, 곧 김금원이 감탄한 총석정을 비롯해 삼일포는 마음먹는다고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평양과 의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금원이 겪었던 제약에서 벗어난 시대에서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가 살던 시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제한이 생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김금원을 보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김금원처럼 넘어설, 혹은 해결할 준비가 되었는지 고민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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