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부터 저녁에 달이 뜨면 피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면 시들어 있는 꽃이 있다. 밤마다 밝은 노란색으로 피는 이 꽃은 달맞이꽃이다. 밤에만 활짝 피어서 이 꽃의 진면목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낮에 보면 꽃잎이 축 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빛이 은은할 때 보면 꽃잎이 팽팽하게 펼쳐진 것이 정말 아름답고 싱싱한 꽃이다.
박완서의 단편 <티타임의 모녀>는 안락한 삶에 흔들리는 운동권 남편을 바라보는 여공 출신 아내의 불안한 심리를 절묘하게 달맞이꽃에 담아내고 있다. 작가가 1993년 발표한 단편이다. 주인공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채 공장에서 일하다 최고의 대학에다 부잣집 출신으로 위장취업한 남편을 만났다. 처음 남편이 위장취업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주인공은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가 꿈꾸는 세상이 서로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말로 설득했다. 아들 지훈이를 낳아 서울 변두리 어느 3층집 옥탑방에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집주인이 여러 야생화를 심어놓은 그 옥상엔 달맞이꽃도 피었다. 어느 날 남편은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득하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중략)… “가만, 가만 저 소리 안 들려?” 나는 입도 뻥긋 안 했건만, 그이는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면서 청각을 곤두세웠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다만 지훈이의 나스르르한 앞머리가 가볍게 나부끼는 걸 보았다.
“아아, 달맞이꽃 터지는 소리였어.” 그이가 비로소 긴장에서 해방된 듯 가뿐한 소리를 냈다.
소설에서 남편은 도감을 찾든 어떻게든 꽃 이름을 알아내 아들 지훈이에게 가르쳤다. 들꽃 지식은 남편이 주인공보다 많이 아는 것 중에서 유일하게 주눅 들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편이 들풀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부터 주인공은 어디 가서 남편과 농사지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 지훈이가 옥상에서 떨어지면서 상황이 완전 달라졌다. 남편은 으리으리한 병원에 아들을 입원시켰고, 뇌수술 최고 권위자가 수술을 했다. 그 병원은 남편 집안이 경영하는 병원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은 아들의 용태에만 관심이 있고 자신은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참담하다.
아들이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가족은 곧바로 옥탑방 대신 대형 아파트에 입주했다. 남편 친구들이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말은 지훈이 회복만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남편도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한번 안락한 삶으로 돌아온 남편은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남편의 쏠림을 달맞이꽃 필 때 귀 기울이던 모습에 비유하며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절묘하게 담고 있다.
달뜨면 피었다가, 아침에 시들어 있는 꽃
달맞이꽃은 바늘꽃과의 두해살이풀이다. 여름에 밝은 노란색 꽃이 잎겨드랑이마다 한 개씩 달린다. 꽃잎은 4장인데 끝이 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꽃은 이름처럼 저녁에 피었다가 아침에 시든다. 저녁에 꽃이 피는 이유는 주로 밤에 활동하는 박각시나 나방 등 야행성 곤충이 꽃가루받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식물의 꽃은 꽃가루받이를 도와주는 곤충에 맞게 진화한 것을 볼 수 있다.
달맞이꽃 같은 두해살이풀은 가을에 싹이 나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꽃을 피우는 생활사를 가졌다. 겨울에 공터 등에 가보면 땅바닥에 잎을 방석 모양으로 둥글게 펴고 바싹 엎드려 있는 식물들을 볼 수 있다. 냉이·민들레·애기똥풀·뽀리뱅이 등이 대표적으로, 그 모양이 마치 장미꽃송이 같다고 로제트(rosette)형이라 부른다. 그중 잎의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어 푸르지도 붉지도 않은 색으로 자라는 식물이 달맞이꽃이다. 이런 형태로 겨울을 견디다 봄이 오자마자 재빨리 새순이 나와 쑥쑥 자라는 식물이다.
달맞이꽃은 어릴 적부터 보아온 아주 친근한 식물이지만 고향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남아메리카 칠레인 귀화식물이다. 하지만 일찍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 잡고 씨앗을 퍼트려 이제 전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아주 우거진 숲에는 들어가 살지 못하고 사람들이 파헤쳐 공터를 만들어 놓았거나 길을 만든 가장자리 또는 경사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길쭉한 주머니 같은 열매 속에 까만 씨앗이 들어 있는데, 한때 이 씨앗으로 짠 기름이 성인병에 좋다고 유행을 탄 적이 있다.
요즘에는 낮에 꽃이 피게 개량한 낮달맞이꽃도 주택가 화단 등에 많이 심고 있다. 그냥 달맞이꽃보다 꽃이 좀 더 크다. 낮달맞이꽃은 달맞이꽃과 반대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닫히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생긴 것도 낮달맞이꽃 비슷하고, 낮에 피면서 꽃 색깔은 분홍색인 분홍낮달맞이꽃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제주도에 가면 해안가 모래땅에서 꽃이 작은 애기달맞이꽃도 볼 수 있다. 줄기는 땅에 누워 자라는데 끝부분은 위를 향한다.
달맞이꽃은 달이 뜨는 저녁에 꽃이 피어 사진을 예쁘게 담기가 참 어려운 꽃이다. 소설 <티타임의 모녀>에 나오는 대로 달맞이꽃이 필 때 실제로 소리가 나는지는 과문한 탓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어떤 식물책에도 나오지 않는 사실이라 달맞이꽃 피는 밤에 몇 번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다 실패했다. 서울 시내여서, 아주 고요한 곳이 아니여서였을까, 아니면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였을까.
어느 정도 크기의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법정스님 일화에 이 달맞이꽃 피는 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다. 다음은 동아일보 2003년 7월 28일자 오명철 문화부장이 쓴 글로, 전남 순천 불일암에서 법정스님과 3박 4일 지낸 이야기를 쓴 글의 일부다.
밤 8시경 달맞이꽃의 개화를 지켜보면서 승속(僧俗)은 일제히 탄성을 터뜨린다. 끝물의 꽃 한 송이가 망울을 터뜨리느라 애쓰는 모습을 애처롭게 보다 못한 스님이 “자, 기운 내거라. 밤새 너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순간적으로 ‘툭’ 하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驚異)’였다.
스님은 불일암에 거처할 때 암자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이해인 수녀도 생전 법정스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느 해 여름, 노란 달맞이꽃이 바람 속에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 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 홈페이지)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