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의 대명사 ‘심청이’를 가수 화사는 ‘멍청이’라고 노래했다. 나도 동의한다. 젖동냥을 하며 키운 사랑스러운 딸이 없는데, 눈을 뜬들 아버지가 행복했을까? 딸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채,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심청이’는 효녀가 아닌 ‘멍청이’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심청이는 전형적인 ‘부모화된 아이(parental children)’이다. 부모와 자녀의 역할이 뒤바뀌어 아이가 부모를 걱정하고, 보살피며, 정서적 위로를 하는 상태인 ‘부모화(parentification)’는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경우,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아 자녀에게 의지할 때, 자녀 중 착한 아이에게, 특히 어머니와 딸 사이에서 흔히 일어난다.
부모화가 진행된 아이들은 착하디착하다. ‘심청이’처럼 희생적이다. 자기의 욕구·감정을 먼저 드러내기보다는 친구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배려한다. 친구에게 힘든 일이라도 생기면 본인이 더 걱정을 하며 해결책을 마련하느라 고민한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어른스러워서 어리광피우거나 툴툴거리는 일도 별로 없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집안일도 곧잘 돕는다. 학교에서도 별문제 일으키지 않는다. 공손하고, 예의바르며, 공감능력도 뛰어나서 오히려 교사들을 더 이해하거나, 위로하며, 시키지 않아도 돕는 일이 많아 ‘○○이 너무 괜찮지 않아’라는 칭찬을 독차지한다.
‘엄친아·엄친딸’같은 이 아이들은 행복할까? 아니다. 불안·우울·분노·서러움·외로움·죄책감 등 복잡한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다. 상대방이 불편해 할까봐 혹은 나를 떠날까봐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부모화가 너무 어렸을 때부터 진행된 경우에는 자신이 왜 이렇게 심리적으로 힘든지 그 이유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일 년에 서너 차례 ‘심청이’같은 아이를 만난다. 한참을 이야기하다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착한 아이’와 ‘효녀’라는 프레임을 걷어내면 어린 심청이가 선원을 따라 배에 오를 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지, 그 작은 아이가 감당해야 했던 심리적 부담감이 보인다. 부모화된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왜 자신의 욕구를 누르며 살게 되었는지, 어른스런 모습이 어떤 방식으로 강화·유지되었는지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나온다. 이번 호에서는 ‘부모화’는 왜 생기며, 지나칠 경우 어떤 마음의 병이 자리 잡게 되는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살펴본다.
자녀에게 의지하는 부모, 부모를 보살피는 자녀
‘네 아빠(엄마) 때문에 우리 가족이 이렇게 고생하잖아’, ‘안 그래도 힘든데 너까지 왜 그래’,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하는 짓은 꼭 제 엄마(아빠) 닮아가지고’, ‘요즘 돈도 없는데, 왜 이리 돈 들어 갈일이 많은지’, ‘어휴, 친구들은 놀러간다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속상해 죽겠네’ 등 부모는 자녀에게 다양한 하소연을 한다. 물론 부모가 자녀에게 하소연할 수도 있다. 짜증이나 화를 낼 수도 있다. 문제는 한두 번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아이에게 거리낌 없이 할 때이다.
부모의 하소연을 습관적으로 듣고 자란 아이는 부모화가 되기 쉽다. ‘돈을 벌수도, 아빠(엄마)를 바꿀 수도 없는’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슬퍼하는 부모를 위로하고, 자기만이라도 착한 아이가 되어 사랑하는 부모님을 속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애쓰기 시작한다. 말도 잘 듣고, 반찬투정도 안하고, 무엇을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으며, 눈치껏 집안일도 돕는다. 반복되는 부모의 하소연이 듣기 싫을 때도 있고, 때로는 응석 부리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대부분 포기한 채 살아간다. 엄마는 나보다 더 힘들고, 내가 투정부리면 엄마는 더 힘들어질 테니까, 자기감정을 숨기고 괜찮은 척 속으로 삭히며 부모 마음을 보살핀다. “아이고, 내 새끼, 너밖에 없구나”라는 칭찬을 들으며, 아이는 자신의 역할을 공고히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무의식’ 중에 일어나고, 자녀가 부모를 보살피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뤄진다. 게다가 착한 아이·효도·배려·희생 등은 칭찬받을 수 있는 덕목이라서 부모가 먼저 깨닫고 놔주지 않는 한, 아이 스스로 그 역할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건 착한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화는 오랜 기간 서서히 스며들어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되며, 부모화가 높은 아이일수록 효·책임감·도덕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부모화’의 문제는 어른답지 못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부모화의 문제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에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자녀가 부모를 보살피는 것은 사이좋은 부모자녀 관계로 보이며, 말을 잘 듣고 효도하는 아이는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화된 아이는 성장과정에서 다양한 문제를 겪으며 어른답지 못하게 성장한다. 자기감정·생각·욕구를 표현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감정·생각·욕구를 듣고 감싸주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하게 된다. 나의 희생으로 상대방이 기뻐하면 나도 기쁘고, 여전히 슬퍼하면 ‘내가 뭘 더 해야 할지’, ‘나 때문에 더 속상한 것은 아닌지’ 불안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점점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맞추며 매달리게 되고, 상대방이 그 마음을 몰라주면 서운하고, 외롭고, 불행하다고 느낀다. 상대방의 반응이 삶의 전부가 된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적이지 못하고 의존적이다. 정작 어른답게 살아야 할 시기에는 어른다울 수 없는 셈이다.
또한 건강한 또래관계·대인관계를 맺기도 어렵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되고, 잘 챙겨주면 되는 일방적 관계인 선·후배와는 달리 서로 싸우고 화해하는 감정소통을 통해 친밀해지는 쌍방향의 또래관계는 어색하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워 함께 웃고 떠들지만, 외로울 때가 많다. 점점 소외감이 들고,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친구들에게 서운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이 서러워진다. 그럴수록 더 눈치를 살피며 노력하지만, 관계개선이 되지 않으면 스스로 관계를 정리한다. 내가 없어도 친구들은 잘 지내니까, 그냥 나만 빠져주면 되는 거니까, 그럼 나도 친구들도 모두 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더 큰 문제는 마음이 힘들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절박한 상태에 놓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느라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속으로 삭히다가 깊은 우울감과 자해·자살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기도 한다. 걱정을 끼치느니 문제의 원인인 자신을 징벌하고(자해), 없애는(자살)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엄마가 힘든 건 모두 저 때문이에요. 혼자서 저 먹여 살리느라 새벽까지 일하시는데…, 제가 공부도 잘하고, 취업도 잘해서 엄마를 보살펴드려야 하는데…, 전 잘하는 게 없어요. 전 왜 이 모양일까요. 차라리 제가 없다면 좀 더 편하게 사실 수 있지 않을까요? 엄마도 나도 둘 다….”
“엄마도 네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걸 알고 계셔?”
“아뇨. 아시면 속상하실 거예요. 그러잖아도 힘드신데, 저까지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아이고, 엄마는 까맣게 모르실 거야. 엄마의 하소연이 너를 이렇게 힘들게 한다는 것을. 이런 네 마음을 아는 순간 정말 깜짝 놀라실 거야. 아마도 엄마는 의지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네가 괜찮은 척하면서 다 품어주고, 알아서 잘 자라주니까 그저 그냥 하소연을 하신 걸 텐데…. 네 말대로 힘드니까. 선생님이 엄마를 한 번 만나 봐도 되겠니?”
부모화된 아이들은 ‘나 때문에’ 상대방이 힘들어 하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것은 낮은 자존감과 자기경멸로 이어진다. 삶의 중심인 엄마(아빠)를 힘들게 하는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것, 즉 ‘희생’이 상대방을 위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희생’은 상대방에게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심청이가 자신을 희생해서 아버지 눈을 뜨게 해주겠다는 행동이,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모화된 아이를 돕는 방법 _ 부모와 상담하기
그렇다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의 하소연을 듣지 말고 거부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상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모든 부모는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자녀를 희생시켜 부모가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부모화가 진행된 가정 역시 자신의 행동이 자녀를 힘들게 할지 몰랐을 뿐이다. 따라서 가족상담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건강한 부모자녀 관계를 정립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가족상담이 어렵다면, 부모상담이라도 이뤄져야 한다. 부모에게 정확하게 상황을 알리고, 성숙한 부모의 역할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와 이야기를 해보니,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라고요. 엄마를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엄마가 힘든 것도 알고, 기특하더라고요. 그런데 부모님 걱정을 너무 많이 해요. 아마 어머님께서 무심코 하시는 넋두리를 듣고는 힘들게 사는 부모님이 불쌍하고, 걱정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데, 능력이 없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자기만이라도 걱정을 안 끼쳐야겠다는 생각에 고민이 있어도 말도 안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어머님, 자녀와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좋고, 부모의 힘든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부모와 아이의 경계가 허물어질 정도 자주 감정을 모두 털어놓으면, 부모의 감정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거든요. 결국 부모는 아이에게 힘들다고 호소하고, 아이는 부모걱정을 하는 거죠. 마치 본인이 부모님을 키우는 것처럼 말이에요. 부모 마음 똑같잖아요. 아이들 잘 되는 거. 이 녀석이 집안 걱정은 부모님께 맡기고, 본인의 미래를 걱정하고 준비하려면 부모님께서 도와주셔야 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심코 하던 하소연은 자녀가 아닌 친구에게 하시거나 스스로 해결하시고, ○○이와는 ○○이 이야기를 해보세요. 학교에서 있었던 일,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부모가 도와 줄 것은 무엇인지….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으로 되돌리는 일은 부모님이 가장 잘 해주실 수 있어요. 내 새끼잖아요.”
부모상담을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모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지 모른다’는 점과 ‘부모 역시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자녀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부모들은 담임교사와 자녀이야기를 할 때, 마치 ‘자식 키운 성적표’를 받는 기분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부모에게 문제를 지적하며 충고하듯 말하는 것은 전혀 효과적이지 못하다. 학생이 힘들어하고 있는 상황을 전달하면서, 부모와 자녀가 건강하게 분리될 때 아이는 아이답게 성장하고, 부모는 부모답게 행동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야 한다. 젊은 담임교사가 부모상담을 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가족상담을 권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이랑 직접 대화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상담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금쪽 상담소’ 프로그램을 봐도 전문가가 문제점을 찾아서 솔루션을 알려주고, 그대로 실천하면 문제가 좀 더 쉽게 해결되곤 하잖아요.”
부모화된 아이를 돕는 방법 _ 학생과 상담하기
아이들은 자신이 부모화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린다. 상담과정에서 ‘자식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며 책임감을 공고히 할 뿐,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불편감에 상담을 거부하기도 한다. 따라서 지금의 행동이 부모님을 사랑하고, 타고난 공감능력과 이타적 성향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부모님을 돌보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함께 돌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부모님 걱정을 하고, 걱정을 안 끼쳐드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쁜 건 아니야.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지. 문제는 ‘나도 함께 돌봐야 한다’는 거야. 지금 네 삶 속에 너는 없잖아. 너는 너의 삶을 걱정하고 준비해야지. 네가 너를 돌보지 않아서 엉망이 되어버리면, 오히려 부모님의 걱정이 더해지지 않겠니?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내 삶을 야무지게 준비하고, 잘 사는 거야. 부모님을 걱정하는 마음도 필요하지만, 나를 챙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단다.”
마음의 건강지표에서 ‘~답게’는 중요하다. 아이는 아이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선생님은 선생님답게. 이런 ‘답게’가 바로 서야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문화적 틀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안정감을 토대로 아이는 자신의 감정·생각·욕구를 내보일 용기를 갖는다. 혹시 학급에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런 모습을 보이는 아이가 있다면, 부모를 너무 걱정한 나머지 부모로부터 돌봄 받기보다는 부모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다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손이 안 가는 아이’라고 손을 안 내밀면 그 아이는 스스로 돌보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어른답지 않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