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꽃’, ‘이름 없는 꽃’ 등.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자 시와 소설 등에서도 어렵지 않게 마주치는 말이다. 그러나 ‘이름 모를 꽃’은 몰라도 ‘이름 없는 꽃’은 거의 없다. 이름 없는 꽃을 찾으면 신종 식물을 발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식물학자들은 이름 없는 꽃을 찾으려고 혈안이라 신종 발견 소식은 뜸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사람들이 흔히 만나는 꽃 중에서는 이름 없는 꽃은 없다.
이름을 모른다고,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2017년 tvN ‘알쓸신잡’ 프로에서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라며 “그런데 요즘 젊은 작가들은 게을러서인지 ‘이름 모를 꽃’이라는 표현을 쓰더라”고 질책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 일화를 보면, 박완서 소설에 많은 꽃이 나오고 그 꽃의 특징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라는 말은 선언적이기까지 하다. 박완서는 어떻게 많은 꽃의 이름과 특징을 알았을까. 단편 <티타임의 모녀>에서 야생화에 빠진 남편은 식물도감 같은 책을 사다가 사진과 대조해 봐도 긴가민가할 때는 일부러 주인을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다. 아마 작가도 이렇게 꽃 이름을 익히지 않았을까 싶다. 장편 <그 남자의 집>에도 주인공이 그 남자네 집 마당에 있는 나무가 보리수인지 확인하기 위해 수목도감을 찾는 장면이 있다.
작가는 또 구리 아치울마을 노란 집 마당에서 수많은 꽃을 가꾸었다. 작가는 여러 글에서 이 마당에서 피는 꽃이 백 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작가의 산문집 <호미> 중 ‘꽃 출석부’를 읽다 보면 숨이 가쁠 정도로 많은 꽃 이름이 나온다. 작가는 이 책에서 “꽃이나 흙에게 말을 시키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일년초 씨를 뿌릴 때도 흙을 정성스럽게 토닥거리면서’ 말을 걸고 ‘싹 트면 반갑다고, 꽃 피면 어머머, 예쁘다고 소리 내어 인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애정을 갖고 꽃을 대하기에 꽃의 특징을 잘 알고 소설 적재적소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박완서 소설에 나오는 생소한 단어들을 모은 ‘박완서 소설어 사전’이 있는데, ‘박완서 소설꽃 사전’을 만들어도 상당한 분량일 것 같다.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김동리와 김정한도 “작가가 ‘이름 모를 꽃’이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된다”고 후배 문인들을 꾸짖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소설가 문순태는 1970년대 습작 소설을 완성하면 서울 동대문구장 뒤편 김동리 선생 댁으로 달려갔다. 선생은 원고를 읽다가 ‘마을에 들어서자 이름 모를 꽃들이 반겼다’ 같은 표현이 나오면 원고를 던져버렸다.
“이름 모를 꽃이 어디 있어! 네가 모른다고 이름 모를 꽃이냐!”는 호통이 이어졌다. 선생은 “작가라면 당연히 꽃 이름을 물어서라도 알아야지. 끈적거리는지 메마른지 꽃잎도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봐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해야지”라고 나무랐다. 자신도 농부들에게 이름을 물어가며 ‘패랭이꽃’이라는 시를 쓴 일화도 알려주었다. 시인 서영은은 1967년 스물네 살 때 김동리를 처음 만났을 때 ‘패랭이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경주 보문단지에 가면 이 시를 새긴 시비를 만날 수 있다. 문순태는 “그 말씀을 듣고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식물도감을 샀다”며 “그 후로는 습지식물인 물봉선이 ‘산꼭대기에 피어 있었다’ 같은 잘못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의 작가 김정한도 후배 문인들이 ‘이름 모를 꽃’이라는 표현을 쓰면 “세상에 이름 모를 꽃이 어딨노! 이름을 모르는 것은 본인의 사정일 뿐. 이름 없는 꽃은 없다! 모름지기 시인 작가라면 꽃 이름을 불러주고 제대로 대접해야지!”라고 꾸짖었다. 선생의 문학과 생애를 기리는 요산문학관(부산)에는 선생이 손수 익모초·광대나물·배초향·꿀풀 등 주변 식물들을 그려가며 정리한 식물도감이 남아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교수는 생전 한 기고에서 이 식물조사 등을 본 것을 회상하며 “엄숙한 문학정신의 영역”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모래톱 이야기>에도 ‘쑥쑥 보기 좋게 순과 잎을 뽑아 올리는 갈대청’,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길찬 장다리꽃(무나 배추의 꽃줄기에 핀 꽃)들’, ‘사립 밖에 해묵은 수양버들 몇 그루’ 등과 같이 생생한 식물 표현들이 많다.
세상의 절반은 식물, 꽃 이름을 아는 만큼 세상의 절반이 환해진다
박완서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가이고, 김동리는 순수문학, 김정한은 참여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그런데 풀꽃 이름을 정확히 쓰라는 측면에서는 놀랍게도 비슷한 일화를 남긴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 고 이청준 선생도 ‘식물 박사’였다. 생전 그와 답사를 가면 풀과 나무 이름을 끝없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식물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한 소설가 홍성원이 식물 얘기를 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막히거나 틀린 부분이 나오면 지적할 정도였다. 이청준추모사업회 김병익 회장은 그래서 “선생의 글에는 생생하고 정확한 식물 표현들이 가득하다”고 했다.
대가들의 지적이 없더라도, 대상의 정확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은 분명하다. 전 국민의 애송시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영변의 약산 이름 모를 꽃’이라고 했으면 지금처럼 사랑받지 못했을 수 있다.
문인들은 ‘이름 모를 꽃은 없다’ 일화에 분발해야겠지만, 일반인들이야 꽃 이름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풀꽃 이름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지나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름을 알면 풀꽃 특징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늘말나리라는 꽃 이름을 알면 꽃이 하늘을 향해 피고, 잎은 줄기를 빙 돌려 달리는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돌단풍이라는 이름에서 돌 틈을 좋아하고 잎이 단풍 모양임을 유추할 수도 있다.
이름 모를 풀꽃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 영영 이름을 알 수 없다. 요즘은 꽃 이름 알기가 전보다 수월해졌다. 전에는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도감을 뒤지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좋은 야생화 책이나 인터넷 사이트가 많다. 그냥 도감이 아니라 계절·색깔별로 쉽게 찾을 수 있게 편집한 책이 많고, 꽃 사진을 올리면 자동으로 또는 ‘고수’들이 바로 이름을 알려주는 앱도 많다. 각각 다음 ‘꽃검색’과 ‘모야모 앱’이 대표적이다. 세상의 절반은 식물이다. 풀꽃 이름을 아는 만큼 절반의 세상이 환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