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는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 전체’로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부모의 역할을 하게 되는 30년 정도의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대의 구분이 짧아지고 있다.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해당하는 MZ세대에 대해 많은 매체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한 세대이지만 그 안에서도 여러 차원으로 나눠지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런데 MZ세대를 묘사할 때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이고 희화화한 경우가 많다. 밀레니얼세대들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는 <요즘 애들>. 사실 제목 자체만으로는 세태를 지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번아웃은 1974년 정신과 의사 허버트 프로이덴버거에 의해 과로의 결과로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붕괴를 겪는 환자들에게 처음으로 진단되었다. 번아웃과 탈진(exhaustion)은 관련이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 탈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는 걸 의미한다. 번아웃은 그 지점에서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또는 몇 년 동안 더 나아가라고 스스로 몰아붙이는 걸 의미한다. _20p
요즘 세대에 대한 특징을 말하기에 앞서 ‘번아웃’에 대한 개념을 먼저 설명하고 있다. 탈진과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면서 더 지쳐가고 있는 사람들. 이 책의 챕터마다 소제목 상단에는 배터리가 줄어들고 있는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다.
“처음 제가 바쁘다고 느낀 건 일곱 살 때였어요.” 1980년대 워싱턴 교외에서 자랐고, 스스로 혼혈이라 밝힌 케이틀린이 내게 해준 말이다. 처음엔 수영·티볼·미술 등 하루에 최소 한 가지 이상의 방과후활동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엔 과외활동에 대한 발언권이 생겼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무용과 연극에 전념했다. 맞벌이였던 케이틀린의 부모는 늘 풀타임으로 일했고 아빠는 자주 출장을 다녔다. 따라서 케이틀린을 각종 학원에 픽업해 주고 방과 후 숙제를 감독하는 건 오페어(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현지 가정에 머물며 아이를 돌봐 주는 사람으로, 주로 젊은 외국인 여성이다)의 몫이었다. 엄마는 성적에 대단히 연연하는 사람이었기에 A학점과 B학점이 아니면 용납할 수 없었고, 딸이 ‘올바른’ 친구들과 어울리는지 점검했다. “어른이 되어 보니,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케이틀린은 말한다. “그냥 쉴 때 죄책감을 느껴요. 대학에서는 학기당 18학점 이상을 듣고,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동아리활동과 자원봉사를 하고, 연극과 뮤지컬에 참여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부족하다는 기분이었죠.” _67p
미국의 사례지만, 낯설지 않다. 우리 아이들의 일상을 보면 얼마나 바쁜가? 놀이터에 가면 아이들을 만나기 어렵다. 학교를 마치면 학원의 연속이다. 유치원 때부터 바빴던 아이들은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더 바빠진다. 바쁜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탈진이 아닌 번아웃 상태가 되고 만다.
디트로이트 교외에서 자란 어맨다는 계획되지 않은 자유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직도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2000년대 초에 대학에 가보니 그때까지 삶의 중심으로 작용해 온, 질식할 만큼 가득 찬 일정이 더는 없었다. 그녀는 회상한다.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제가 게으르고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제 가치가 의심스러워졌죠.” 오늘날 어맨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느낀다. 불안 발작으로 응급실 신세를 진 뒤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하루쯤은 원하는 걸 해도, 온종일 넷플릭스를 정주행하거나 그냥 쉬어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심리치료사의 제안에 응하기 어렵다. 일이 아니라면 무얼 하고 싶은지 정말로 모르기 때문이다. _85p
자신이 번아웃인지 아닌지 테스트해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불안하고 죄책감이 느껴진다면 번아웃 상태인 것이다. 너무도 바쁜 굴레 속에 있다 보니 그 관성으로 인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대학교육은 희소한 경험이었다. 돈 있는 집에 태어난 백인 남성이 아니라면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수습이나 현장훈련을 통해 업무와 지식을 익혔다. 1940년에 25세 이상 미국여성 가운데 학사학위 보유자 비율은 4%에 그쳤고, 남성의 경우는 5.9%였다. 전체 인구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비율은 14%에 불과했다(2018년엔 25세 이상 인구의 90.2%가 고등학교를 마쳤고, 45.4%가 준학사 혹은 학사학위를 지녔다). _105p
학력이 점점 높아지면서 고등교육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밀레니얼세대에게 학업은 더 큰 부담으로 작동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미국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 대학을 진학하고 있다. 최근 70%대로 다소 내려가기는 했지만 2010년대 초반에는 82%가 넘기도 했다. 대학교육을 필수로 여기는 사회적 풍토는 가정으로 바로 이어진다.
소위 타이거 맘(Tiger Mom: 엄격한 계획 아래 자녀를 교육시키는 아시아계 부모를 일컫는 표현)은 언론에서 흔히 무신경하고, 자녀를 지배하려 들며, 자녀들을 대학을 위해 준비시킨다는 한 가지 목적에만 전념하는 비미국적인 부모로 묘사된다. 그러나 좋은 미국인들(다시 말해 중상류층 백인 미국인들) 역시 똑같이 행동한다. 대학에 대한 대화를 행복과 적응, 잠재력 실현이라는 수사로 가렸을 분이다. 미국 부모들이 덜 무신경한 편이지만, 둘 다 헛소리인 건 똑같다. _122p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권 이민자들이 유난을 떤다는 식으로 비난하던 미국인들도 사실은 자녀들의 대학입시에 엄청난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요즘 세대들은 이러한 사회적 풍토 때문만으로 힘들어진 것일까?
수많은 밀레니얼의 유년기를 함께한 브랜드, ‘토이저러스’의 예도 있다. 2005년에 토이저러스는 3개의 사모펀드에 의해 인수되어 빚더미에 앉았다. 2007년에는 이익의 97%가 이자상환에 쓰였다. 현실적으로 이는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기술을 혁신하고, 점포를 리모델링하고, 새로운 전략을 고안할 시간이 없다는 의미였다. 사모펀드 소유주들은 토이저러스의 군살을 없앴고, 다음으론 뼈만 남겼고, 마침내 2017년에 파산시켰다. 점포들은 청산되고 모든 점원은 해고당했다. “사람들은 토이저러스를 죽인 주체가 아마존이나 월마트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토이저러스는 파산 직전 최후의 순간까지도 엄청난 수의 장난감을 팔고 있었다.” 독점 반대 운동가 맷 스톨러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토이저러스를 파괴한 건 금융가들과 소유와 책임의 분리를 허용한 정책들이었다.” _182p
이어지는 장에서는 자본시장을 잠식하는 기업들의 잘못된 행태를 꼬집고 있다. 기업의 가치나 노동자들의 삶과 상관없이 투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행태로 인해 건전한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러한 욕심으로 뭉쳐진 기업들을 상대로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으로 이 책에서는 밀레니얼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문화를 지적하며 끝을 맺는다.
처음 아이폰을 샀을 때, 아무 때나 무엇이든 검색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이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핸드폰에서 분리되면 환지통을 느낄 것 같다. 예전엔 집에 핸드폰을 놓고 와도 온종일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작년 주말여행을 떠날 때 집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가 엄청나게 붕 뜬 기분을 느꼈다. 각종 알림이 나를 어떻게 조종하는지 정확히 알면서도, 리프트앱으로 부른 차에서 내리며 주머니에 진동을 느낄 때 짜릿하다. 무슨 알림이지? 아, 리프트에서 운전자를 평가해 달라는 거군. 나는 찰나이지만 사탕처럼 달콤한 독약을 나에게 먹이기 위해, 레버를 누르는 실험용 쥐가 되어버렸다. _252p
삶에 편리함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스마트기기들은 어느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야말로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여러모로 힘들게 살아가는 요즘 세대…,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혼란함 속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책의 후반부에 나온 작가의 경험은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이 책을 쓰는 도중에 나는 숲에 들어갔었다. 노트북을 충전할 태양 전지판을 미리 구매했다. 그리고 호숫가의 한 캠프장에서 인터넷 없이, 핸드폰 신호는 아주 좁은 구석자리에서 간신히 문자메시지만 전송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나와 원고, 책들, 감미롭고 넓은 웅덩이 같은 기나긴 시간뿐이었다.
매일이 거의 똑같았다. 기상하고, 개들과 산책하고, 몇 시간 일하고, 달리기하고, 점심을 먹으며 소설을 읽고, 개들과 또 산책하고, 몇 시간 일하고, 방금 쓴 글을 편집하며 맥주를 한잔하고, 개들에게 수영시키고, 텐트에 돌아가 소설을 읽고, 잠자리에 든다. 엿새를 이렇게 살고, 2만 단어를 썼다.
실제로 글을 쓰는 데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루에 6~7시간이었을 것이다. 보통과의 차이점은, 내가 이 시간을 실제로 글을 쓰며 보냈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개를 쓰다듬었다. 할 게 없었으니까. 아니면 그냥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쓰고 있던 원고로 돌아갔다. 집중력과 목표는 기적처럼 그대로 남아있었다. _27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