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보고, 저리 봐도, 알 수 없네. 둘리 둘리~’
빙하를 타고 서울시 우이천으로 떠내려 와 심술궂은 고길동 아저씨 집에 더부살이하게 된 ‘아기공룡 둘리’의 노래가 귀에 익숙하게 감긴다면? 동네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호이! 호이!’, ‘짠!’, ‘깐따삐야~!’,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라고 외치며 해 질 무렵까지 놀았던 기억이 떠오른다면? 아마도 1980~90년대를 아기공룡 둘리와 함께 보낸 세대일 것이다.
어린 시절 추억 속에만 남아 있던 아기공룡 둘리가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아기공룡 둘리의 유일한 극장판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감독 김수정, 이하 ‘얼음별 대모험’)이 둘리 탄생 40주년을 맞아 극장에서 재개봉한 것. 어? 귀염둥이 둘리가 벌써 마흔 살이나 되었다고? 그렇다. 1983년 4월 22일생 둘리는 경기도 부천시에서 주민등록증까지 발급받은 어엿한 주민이다.
둘리 시리즈는 만화잡지 <보물섬> 연재를 시작으로 TV 시리즈와 극장판 애니메이션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다.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계에서 둘리는 콘텐츠 산업의 태동기를 일군 캐릭터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스크림부터 시작해 팬시 제품까지 둘리 캐릭터 상품만 2천 종에 달하는 대표 캐릭터.
기억 속 둘리는 늘 고길동 아저씨에게 구박당했다. 밤마다 쫓겨나 담벼락에 쓸쓸히 기대어 고길동 아저씨가 잠들면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둘리에게는 친구들이 있다. 부끄럼쟁이 여자 타조 또치, ‘타임 코스모스호’를 타고 지구에 불시착해 지구인을 애완동물로 여기는 도우너, 가수를 꿈꾸는 이웃집 음치 청년 마이콜까지. 고길동 아저씨의 조카 희동이도 둘리가 살뜰히 돌봐야 하는 아이다.
고길동 아저씨는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광화문 인근 회사에 다닌다. 재산이라곤 쌍문동 집 한 채가 전부인데, 주택융자가 5천만 원에 사채까지 있는 캐릭터. 도마뱀인지 공룡 새끼인지도 모를 모호한 생명체가 갑자기 집에 살게 되고, 그 와중에 정체가 불분명한 친구들까지 자꾸 데리고 온다. 쫓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둘리 일당은 똘똘 뭉쳐서 고길동 아저씨를 괴롭힌다.
둘리가 마흔 살이 되면서 어느덧 나이를 먹고 인생살이의 팍팍함을 경험한 팬들에게는 그런 고길동 아저씨가 새롭게 보인다. ‘고길동 아저씨가 불쌍해지면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이라는 이야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지만 영원한 둘리 아빠 김수정 작가는 “나이가 들었다고 배신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둘리 탄생 40주년을 맞아 김수정 작가를 만났다.
살 같이 흐른 세월이 우리를 변하게 한 것일까?
“어린 시절 둘리를 절대적으로 좋아하고 지지하던 팬들이 이제는 고길동을 짠하게 생각한다고요? 어릴 때는 그렇게나 고길동을 싫어해서 적으로까지 생각했던 분들이 40대가 되고,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배신을 때리면(?) 안 되죠(웃음).”
요즘 젊은 세대들은 둘리도 둘리지만 고길동에 대한 애정이 크고, 사실 악독한 사람이 아니고 능력자였다는 재평가가 있다는 기자의 말에 김수정 작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고길동과 둘리 모두가 소중한 캐릭터라며, 둘리에 대한 사랑을 잊지 말라는 주문과 함께. 사실 영원한 둘리 아빠 김수정 작가는 둘리 탄생 40주년을 기념해 팬들에게 보낸 손 편지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오랜 시간, 울고 웃으며 둘리와 함께했던 순수했던 유년의 시간을 밀어내고, 우리 가슴속에는 어느새 길동씨가 전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살 같이 흐른 세월이 우리를 변절하게 한 것일까? 아니면, 굴절된 기억이 우리를 변하게 한 것일까요? 길동씨를 이해하면 어른이 된 거라고요? 정말 그럴까? 바로 지금이 그 추억과 그리움,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요?”
김 작가의 말처럼 <얼음별 대모험>을 보면 변한 건 관객이지, 둘리나 고길동이 아니다. 이야기는 여전히 같은데 단지 우리의 입장·위치·환경이 변한 것일 뿐. 그저 둘리를 좋아했고 지지했던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나본다면? 어쩌다 보니 고길동에게 빼앗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서 말이다.
풍성한 색감, 지금 봐도 새로운 캐릭터들
<얼음별 대모험>은 1996년 극장판을 디지털 복원한 작품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색감이 눈에 띈다. 둘리를 다시 극장에서 만나는 관객들도 많다(6월 10일 기준 누적 관객 수 9.5만 명). <얼음별 대모험>은 둘리 일당이 고장 난 타임 코스모스호를 타고 우주로 떠나는 이야기다. 2023년에 다시 봐도 바요킹·핵충·가시고기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눈에 띈다. 어떻게 이런 ‘신박한’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었을까? 김 작가의 답변이 걸작이다.
“우주라고 하면 흔히 할리우드식으로 생각하는데요.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아이들만의 상상력을 어떻게 가져올지 고민했죠. 우주에 공중전화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쓰레기 문제가 심각했는데 이렇게 가다간 우주가 쓰레기장이 될 수 있을 거란 상상도 했어요. 그런 지저분한 우주에 뭐가 살지 알 수 없으니, 바이킹을 패러디한 ‘바요킹’도 나오고요, 핵폐기물을 먹고 사는 ‘핵충’이라는 괴생명체도 탄생하게 된 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를 영감을 발휘해 풀어가야 하는 것이 작가들의 영원한 숙제인 거죠.”
한국에서 창작 애니메이션이 흥행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둘리만큼 장수하는 캐릭터를 찾기란 더더욱 어렵다. 특히 올해는 재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을 일컫는 말) 열풍이 일어난 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460만 관객을, <스즈메의 문단속>(감독: 신카이 마코토)은 550만 관객을 동원했다. 반면 한국 창작 애니메이션계 소식은 암울하다. <검정고무신>의 이우영 작가가 최근 저작권 분쟁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구름빵>의 백희나 작가 사태까지 마주하게 된다. 김 작가는 일련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자세히 알고 있는 사안은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사례가 앞으로 더 일어날 소지가 많다는 거예요. 이제는 1인 작업시대가 아닙니다. 모든 작업이 협업이죠. 지적소유권을 갖는 사람이 많아지는 거예요. 후배들에게는 작업 초기부터 각자의 저작권·지적소유권에 대해 명확히 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는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미래가 어둡지 않다고 확신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웹툰시장을 보면 젊은 작가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에 놀란다고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보다 한국 애니메이션과 웹소설에서 훨씬 자유로운 구조를 발견한다는 것. 김 작가는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웹툰 중에 현대화된 문화 속에서 서구지향적인 소재가 많지만, 한국문화의 뿌리에 관심을 두는 작가도 곧 출연할 것으로 예상한다. 제작비 회수가 어려워 ‘가뭄에 콩 나듯’ 투자하는 자본시장이 좀 더 안정된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이 세계를 무대로 훨훨 날아갈 날들이 멀지 않다는 예측이다.
극장판 준비로 출판만화 중단한 것이 가장 아쉬워
40년. 통상 한 세대를 30년으로 간주해도 긴 세월이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둘리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 작가는 사람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친근함’이야말로 둘리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둘리의 정신연령은 7살 어린이.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을 관찰하면서, 장난칠 법한 것들을 둘리 캐릭터에 녹여낸 것. 둘리뿐만이 아니다. 음치 마이콜은 실제 김 작가가 쌍문동에 거주할 당시 이웃집에 살던 가수 지망생을 참고했고, 고길동은 80년대 40대 직장인의 모습을 녹였다. 직장인의 모습·습성을 관찰하기 위해 오피스들이 가득한 빌딩 숲을 누비기도 했다.
평생을 만화가로 살아온 영원한 둘리 아빠 김수정 작가. 혹시 만화가로의 삶을 후회한 적은 없을까. 어떤 삶이나 후회가 있겠지만, 오히려 만화를 더 그리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기공룡 둘리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준비하느라 출판 만화에 손을 놓은 것이 바로 그것. 1인 작가 체제로 오랜 세월을 보내온 그가 둘리를 비롯한 여러 출판 만화를 그리면서 극장판 애니메이션 총감독까지 맡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룬 것에 대한 만족은 모르는데, 놓친 것은 후회스럽죠. 물론 힘들었지만, 출판 만화를 하면서 애니메이션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있어요. 우리 일이라는 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눈 나빠지고 손 떨리면 못해요. 젊어서는 앞으로 할 일을 계획했지만,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를 역으로 생각해요.”
둘리의 새로운 모험 이야기를 극장에서 또 볼 수 있을까? 김수정 작가는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2013년 개봉을 계획했던 극장판이 있었어요. <방부제 소녀들의 지구대침공>(가제)라는 애니메이션인데요, 둘리 일당이 얼음별에 가서 난장판을 만들었다면, 후속편에서는 반대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이야기입니다. 둘리와 친구들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외계인을 막아내면서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죠. 우선 중단했던 만화책을 먼저 출판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