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덟 번 째 막내딸의 결혼식 전날 일흔 둘의 어머니는 내일이면 신부가 될 막내와 나란히 누워 천정을 쳐다본다. 이 딸을 낳던 그 이른 봄 쌀쌀했던 산부인과 병실에 누워있던 자신의 모습이 어제처럼 다가온다. 어머니는 성장한 딸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는다. “엄마, 얼마만이예요. 저를 껴안고 자던 것이?” “세 살 때까지 엄마의 젖을 먹었으니까, 이십삼 년 만이다.” “제가 세 살 때까지 엄마 젖을 먹었어요? 그 때까지 엄마가 젖이….” 막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세 살 때까지 젖을 먹었다니, 처음 듣는 말이다. “세 살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너도 천재는 아니구나.” 옆 침대에서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제가 세 살 때까지 엄마 품에 잤다면 아빠가 저를 얼마나 싫어했을까? 제가 엄마의 젖을 다 차지해 버렸으니?” 막내가 아버지를 향해 돌아누우면서 실눈으로 웃었다. “아, 생각이 나요? 자다가 한밤중에 잠이 깨어보면 제가 엄마 등 뒤에 혼자 있었어요. 아빠가 절 뒤로 밀려버렸지요?” “프로이드할아버지가 들으면 웃겠구나. 엄마를 사이에 두고 딸이 아빠와 다투었으니….” 셋은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런데 왜 저를 세 살 때까지 젖을 먹이셨
심영옥 | 경희대 겸임교수·미술사 경남 진주의 촉석루 입구에는 '실크박물관(1층)'과 '향토박물관(2층)'으로 구성된 진주향토민속관이 있다. 이 향토민속관은 '태정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태정은 김창문의 호다. 김창문은 원래 진주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6.25 한국전쟁 후 어느 날 자신의 가게 앞에서 엿을 팔던 엿장수 지게 위에 내팽개쳐져 있던 경첩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함부로 버려진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그 후 40여 년 동안 서양가구의 보급으로 하찮게 버려진 수많은 장석과 가구, 생활민속품을 수집했고, 수집품은 향토박물관의 토대가 되었다. 평범한 시민의 정성어린 집념이 자칫 사라질 수 있었던 우리의 아름다움을 되살린 것이다. 학문적인 내용이나 사상을 제쳐놓고서라도 의기 논개가 몸을 던져 나라를 도운 것처럼 태정도 자신의 사업을 멀리하며 한국미의 뿌리를 만들어 놓은 것은 어쩌면 우리 민족에게 흐르는 예술혼 덕분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한 사람의 집념으로 수집된 장석은 우리 전통 가구의 아름다움은 물론 장석들의 다양한 문양을 통하여 옛 선조들의 미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 더욱 의미가 크다. 장석(裝錫)이란 자연미와 인공미를 최대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오랜 방랑 생활 끝에 황제로 등극 몽골은 거란과 함께 동호계(東胡系)로 분류되어 중원의 한족과 반도의 사대주의자에게는 상종치 못할 오랑캐 나라였다. 그러나 원의 지배를 받는 동안 한족들은 민족차별에 불만을 느끼고 지하에서 골수중화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성리학을 완성시키는 한편, 정사 〈삼국지〉를 변조하여 유비의 촉한을 정통중화로 조작하는 공정을 진행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통치가 느슨해지자 각지에서 들고일어났고 당시 중국 남방지역에서 백련교(白蓮敎)의 홍건군이 발흥하여 반원항쟁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당시 원나라는 몽골황실의 권력다툼이 치열하였다. 몽골제국의 제4대 황제인 몽케칸의 아우 쿠빌라이가 1279년 원나라를 건국하였으나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막내 동생인 아리쿠부카와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즈가 반란을 일으켰다. 쿠빌라이의 '유목과 농경의 조화를 통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 정면 도전한 것인데, 결국 이러한 싸움은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어 제국의 단명을 재촉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찍부터 제위 세습제가 정착된 한족과는 달리, 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제위를 꿈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