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68학번 내 대학 동기생이다. 그의 오래된 ‘짐보따리 이야기’는 한참 우스워서 듣다 보면, 무언가 아리고 슬픈 것이 눈물을 불러온다. 나는 J의 ‘짐 보따리 이야기’를 세 번 들었는데, 들을 때마다 재미와 감동이 조금씩 다르게 묻어났다. '무엇보다도 1968년 그즈음의 시대적 애환과 풍물, 인심과 정서가 얼마나 여실한지, 그 시절 짐과 삶의 상관이 잘 들여다보인다. J의 ‘짐 이야기’에는 궁색하고 고단한 그 무렵 시골 출신 대학생들의 생활 풍경들이 정직하게 비쳐 들어서, 쉽게 느낄 수 없는 ‘시절의 정서’가 애틋하게 스며 있다. J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박 교수, 자네 알지. 내 고향 집이 저 먼 남쪽 해남(海南)에 있다는 거. 해남에서도 끝자락 완도로 넘어가는 동네, 북평면이야. 지금도 벽지이지만 1968년 우리가 대학 1학년 때 얼마나 궁벽한 곳이었는지. 그해 겨울방학 끝나고, 시골집에서 서울로 와야 하는데, 어머니가 무언가를 이것저것 챙겨서 짐 보따리에 싸 주시는 거야. 서울 변두리에서 자취하는 아들을 챙겨 주시는 가난한 어머니의 마음은, 줄 게 없어 허전하면서도, 없으면 없는 대로 온갖 걸 다 찾아서 챙겨 주시는 거 있지? 박 교수, 옛날
어린이들이 신나고 즐거울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한 음절의 감탄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는 ‘와!’라고 대답한다. “와! 정말 신난다”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 자신도 그렇게 대답하고, 조사하는 선생님들도 동의한다. 어린이만 그런가. 어른들도 모두 ‘와!’라고 말한다. 그런데 1980년대만 해도, ‘와!’라는 감탄사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와!’라는 감탄사보다는 ‘야!’라는 감탄사가 우리의 주류 감탄사였다. 실제로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교문을 나서며 함박웃음을 짓는 어린이들 얼굴을 신문 1면에 큰 화보사진으로 올리는 일간지들은 이 사진의 설명으로 “야! 신나는 방학이다”라는 문장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지금은 이 ‘야!’라는 감탄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잘 안 쓰게 된 것이다. 그 연유는 이렇다고 한다. 그 무렵 각종 만화산업이 번창했던 경제 선진국 일본은 일본만화책의 대량 인쇄를 인쇄비용이 저렴한 한국의 인쇄업소에 대량 발주하였다. 이 바람에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의 인쇄소들은 모처럼 호경기를 누렸는데, 부작용도 있었다. 이때 인쇄소 작업과정에서 빠져나온 일본만화들이 한국어로 졸속 번역되어 국내 만화시장에 나돌았다고 한다. 저작권 제도와 인식
올림픽 경기 시상중계를 보며 간간 느끼던 현상이다. 특히 유도·권투·태권도 등 격투기 경기 분야의 시상대에서 무심히 지나치지 않게 되는 장면이 있었다. 시상식이라는 게 대략 이렇게 진행되지 않았나 싶다. 경기가 끝나는 대로 금메달 선수와 은메달 선수와 동메달 선수가 정해지고, 이들이 시상대에 오르면 국제 스포츠계의 유명 인사가 나와 메달을 걸어주고, 악수로 치하한다. 이어서 메달리스트 선수들이 메달을 걸고 시상대에 서면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연주된다. 감격이 경기장 안에 번져나간다. 감격의 물결은 선수들 마음 안에서 더욱 격하게 요동할 것이다. 선수로서는 명예와 보람이 깃발처럼 나부끼는 장면이다. 금메달 선수는 갈등 없는 환희와 보람을 구가한다. 그러나 은메달 선수와 동메달 선수는 꼭 그렇기만 하지는 않다. 금메달을 얻지 못한 아쉬움은 은메달 선수나 동메달 선수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좀 유심히 보면 은메달 선수보다는 동메달 선수의 표정이 더 밝고 평온하다. 자기가 딴 동메달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모든 시상대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이런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등위대로만 기쁨과 보람이 비
나는 중·고등학교 6년을 추풍령 바람과 함께 시오리(6㎞) 들판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아침 등교는 추풍령 바람을 등에 지고, 저녁 하교는 추풍령 바람을 가슴으로 안고 다녔다. 겨울이면 추풍령 내리닫는 북서풍 바람에 등을 떠밀리며 허둥허둥 학교에 갔다. 행보 전체가 불안정하고 공연히 마음만 다급했다. 꼭꼭 눌러 쓴 교모도 사정없이 날아갔다. 하교하는 길은 바람이 숨을 막았다. 체급 낮은 내가 거구의 추풍령 바람과 밀어내기 한판을 겨루며 간다. 아주 육중하고 뻑뻑한 철문을 온몸으로 밀어제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찍듯이 나아가야 한다. 자전거도 무용지물, 내려서 붙잡고 걸어갔었다. 심한 눈보라 속을 가는 자세로, 상반신을 30도 정도 웅크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걸었다. 더구나 이 길은 약간의 경사까지 있어서 집으로의 귀환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렇게 추풍령 바람이 있어 내 다리에는 근육이 다져졌으리라. 뒷날 인생 풍파를 헤쳐나가는 정신의 근육 또한 다져주었으리라. 바람의 은혜라 해야 할 것이다. 바람의 기억은 인생 굽이굽이마다 있었다. 젊은 시절, 설악산에서 길을 놓쳤다. 대청에 오른 다음에 하산 길로 인적 드문 화채봉 코스를 모험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