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교사는 감정노동이 심한 직업이다. 교실에서 날이 선 말투,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아이가 한 명만 있어도 온종일 마음이 편치 않다. 퇴근하면서 걱정을 학교에 놓고 나오기도 쉽지 않다. 내일 수업 고민, 처리해야 할 업무 등등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탓이다. 그래서 학년 마무리인 12월쯤 되면 선생님의 마음은 너덜너덜해진다.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교무실은 벌써 내년도 학교 이동, 부서 배치, 담임 배정 등으로 술렁거린다. 가슴 한편에는 체념과 실망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어차피 나는 또 인정 못 받을 거다. 올해의 고생이 내년의 고통으로 이어지겠지. 나의 처지를 배려해 줄 여건도 안 되고, 힘든 업무와 학생 지도를 피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래서 연말, 송년회 모임은 상처로 다가온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했다. 이제는 학창시절 뒤처졌던 동창들이 더 잘나가고 행복한 듯싶다. 힘들다고 푸념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안정된 데다 방학까지 있는 선생님이 뭐가 힘들다 그래?”라는 질책(?)만 되돌아 뿐임을 잘 아는 탓이다. 이럴수록 명예퇴직과 이직을 꿈꾸는 일도 잦아진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은 칭찬으로만 바뀐다 “빨간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 이 지시는 생각을 덫에 빠뜨린다. 시키는 대로 하려면 먼저 빨간 코끼리를 떠올려야 하는 탓이다. 빨간 코끼리가 머리에 있어야 이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겠는가. 이를 심리학자들은 ‘프레임의 법칙’이라 부른다. 일단 사고의 틀이 짜이면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교실에서 야단과 질책이 생각보다 효과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게으름 피우지 말아”라는 충고에는 상대방이 나태하다는 평가가 묻어 있다. “떠들지 말고 집중해”라는 표현에는 수업시간에 산만하다는 선생님의 판단이 스며난다. 그래서 야단과 주의의 효과는 잠시뿐, 아이들은 선생님이 뜻했던 바와 반대로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은 칭찬으로만 바뀐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올곧고 모범적이며 괜찮은 사람으로 여길 때 기대에 맞게 처신하려 애쓴다는 뜻이다. 그래서 칭찬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바뀌려 애를 쓴다면 선생님은 이를 악물고서라도 칭찬을 거듭해야 한다. 변화를 시작하는 무렵에는 학생 스스로도 자기가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사는 더더욱 칭찬과 격려를 자주 하며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학교는 좋은 삶의 루틴을 만드는 곳” “당신이 뭘 먹는지 알려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샤브랭의 말이다. 이 말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을 듯싶다. “당신 일상의 루틴을 알려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일러주겠다.” 삶은 결국 매일 거듭되는 일상이 쌓여 만들어진다. 직장인에게는 직장인의 루틴이, 프리랜서에게는 프리랜서 나름의 루틴이 있다. 학교는 학생들이 ‘좋은 삶의 루틴’을 갖추도록 돕는 곳이다. 아이들이 매일 학교에 시간 맞추어 오기만 해도,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함을 갖추게 될 터다. 시간에 맞추어 꼬박꼬박 급식을 먹는다면 규칙적인 식사습관이 몸에 밴다. 나아가 학교일과에 꾸준히 참여하여 성실하게 활동을 거듭한다면 튼실한 몸과 풍성한 교양을 갖추게 될 것이다. 코로나 시기에 일상이 무너졌던 상황을 떠올려 보라. 학교는 ‘좋은 삶의 루틴을 갖추게 하는 곳’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듯싶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좋은 일상 루틴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작 선생님들은 어떨까? 학교의 루틴이 거듭될수록 교사의 삶도 훌륭하고 바람직하게 바뀌어 갈까?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기
“인간관계는 고슴도치의 사랑과 같다” 고슴도치는 서로 가까이 다가가면 상처를 입는다. 상대의 가시에 찔리는 탓이다. 다치지 않으려 상대방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면 이번에는 외로워진다. 그래서 또 다른 고슴도치에게 다가가고, 아픔을 겪기를 거듭한다.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어떨까? 별다르지 않다. 사이가 가까워지면 상대 때문에 힘들어지고, 멀어지면 쓸쓸해진다. 이렇게 사람들은 상처와 외로움 사이를 끝없이 오가며 고통받는다.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r, 1788~1860)의 말이다. 학교에서의 사람 사이도 비슷하다. 7월은 1학기 끝물에 접어드는 시기다. 첫 만남의 서걱거리고 어색한 분위기는 진즉 사라지고 없다. 아이들끼리도, 선생님과 학생 사이도, 선생님들끼리도 살갑고 친근한 대화가 오간다. 하지만 가까워진 만큼 사이가 삐걱대는 상황도 점점 많아질 테다. 선 넘는 학생, 경우 없는 동료 탓에 마음고생하는 때가 얼마나 많던가.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거리 두기’를 강조한다. 적절히 떨어져 있는 관계가 건강하다는 의미다. 그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비결로 ‘예의’를 강조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를 갖추어야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적겠다
“6월의 고비, 나는 무능한 교사일까?” 떠드는 아이는 수업을 힘들게 한다. 반항하는 친구는 하루 종일 선생님을 심란하게 한다. 무기력한 학생은 이보다 더 어렵다. 악평이 무관심보다 차라리 낫다고 하지 않던가. 뭘 하든 반응이 없는, 언제나 스마트폰만 찾는 아이들, ‘최소성취보장제’ 덕분에 이런 친구들은 선생님들의 최고 관심 학생이 되곤 한다. 그들은 언제나 모든 일에 심드렁하기에 성적이 바닥에 다다랐을 터. 그래도 교사는 아이들을 일깨워야 한다. 이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교도 겨우 나오는 판인데, 이 아이들에게 공부 의욕을 어떻게 불어넣는단 말인가. 장마와 더위가 찾아드는 6월은, 선생님에게 무기력과의 싸움이 본격화되는 시기다. 무관심·짜증·신경질 섞인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면 자괴감이 밀려든다. “나에게 선생님이 맞는 직업일까? 나는 무능한 교사 아닐까?”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고민에 휩싸이신다면, 경영 사상가 다니엘 핑크(Daniel H. Pink)의 동기이론을 살펴보셨으면 좋겠다. “PBL, 효과 만점인 영혼의 MSG” 다니엘 핑크는 줄기차게 ‘동기 3.0’을 이야기한다. ‘동기 1.0’은 먹고 자는 일 같은 생존욕구
“회한과 후회라는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지옥에서 악마는 사람들을 자신들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그때 느꼈던 아픔과 상처를 영원히 거듭해서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벌 받는 이들은 몸부림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사실 지옥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의지가 있다면 죄인들은 얼마든지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도 지옥의 죄수들은 닥친 고통이 너무나 절절한 나머지,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 미드 루시퍼에서 그리는 지옥의 풍경이다. 우리의 처지도 별다르지 않은 듯싶다. 삶 속에서 회한과 후회라는 지옥에 빠져 지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가슴에 칼을 꽂는 듯한 모욕감·모멸감에 치를 떨던 가슴 아픈 순간들, 처절하게 등 돌리고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추억 등, 상처와 아픔은 기억으로 생생하게 살아나서 나를 지옥으로 이끌곤 한다. 물론 과거는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잊어버리고 지금의 생활에 오롯하게 매달리는 편이 맞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마음은 아픈 과거를 곱씹고만 있다. 이런 회한과 후회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픔을 충분히, 제대로 곱씹으라.” 이 물음에 대해 미국의 정치 철학자 마샤 누
“회한과 후회라는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지옥에서 악마는 사람들을 자신들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그때 느꼈던 아픔과 상처를 영원히 거듭해서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벌 받는 이들은 몸부림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사실 지옥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의지가 있다면 죄인들은 얼마든지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도 지옥의 죄수들은 닥친 고통이 너무나 절절한 나머지,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 미드 루시퍼에서 그리는 지옥의 풍경이다. 우리의 처지도 별다르지 않은 듯싶다. 삶 속에서 회한과 후회라는 지옥에 빠져 지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가슴에 칼을 꽂는 듯한 모욕감·모멸감에 치를 떨던 가슴 아픈 순간들, 처절하게 등 돌리고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추억 등, 상처와 아픔은 기억으로 생생하게 살아나서 나를 지옥으로 이끌곤 한다. 물론 과거는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잊어버리고 지금의 생활에 오롯하게 매달리는 편이 맞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마음은 아픈 과거를 곱씹고만 있다. 이런 회한과 후회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픔을 충분히, 제대로 곱씹으라" 이 물음에 대해 미국의 정치 철학자 마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