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식인 사회의 풍속도는 요지경으로 바뀌어 가는가? 이번 삼성 회장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함으로써 파문이 일게 된 지식인 집단의 문명의 흐름타기는 시대의 조류에 따른 흐름에 편승하기에 지나지 않는지. 아니면 우리 사회의 지식인에 대한 폄하를 드러내는 산 증거인지. 밝고 맑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개혁을 부르짖던 현 정권에서도 그 개혁의 수레바퀴에 발목을 잡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인가? 지식인 집단은 곧은 정신을 이어받아야 물은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이고, 권력은 10년이 지나면 부패해 지기 싶고, 꽃은 10일이 지나면 시든다는 등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격언처럼 전해진다. 사회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장기간 지속되게 되면 어느 한 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의 지연, 학연, 혈연이 한국 사회의 오랜 병폐인 양 바꾸어 보고 변화시켜 보려고 했건만 그 틀의 깊이를 바꾸어 가는 데는 아직도 미흡한 상태다. 한 집단이 유지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조류를 거역할 수 없지만, 그래도 시대의 외양 패션에 둔감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 집단의 자세인 것이다. 옛 선비들이 시대의 조류
인간이 인간다워야 한다고 줄기차게 외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사람다움이 형성되고, 공동생활을 통해 질서를 배우게 되고, 책을 통해서 스스로의 인격을 수양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배움의 터전은 교사와 학생의 보금자리 같아야 하고, 서로와 서로를 도와주는 우정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육의 장은 어떠합니까? 교사가 학생에게 우롱당하고, 학생이 교사에게 예사로 폭언을 일삼고, 심지어는 교사에게 달려들기까지 하는 현장을 두고도 “쉬〜쉬” 문화에 종속되어 넘어가는 현장을 누구에게 하소연 해야 합니까? 차라리 암행어사 박문수라면 “암행어사 출도야”라고 외칠 수나 있으련만, 교사가 제자에게 폭력적 모욕을 당하면 어디에 가서 사설을 늘어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한국적 인성 교육 되살아나야 며칠 전 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 사건”을 관람하고 난 후 우리 사회의 자녀 교육에 대해 심도있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부족함 없이, 어려움 없이 자라나는 신세대들은 모든 것이 자기들의 의사대로 행동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세대들, 자신의 생각대로 내뱉는 세대들, 달면 삼키고 쓰면 쉽게 뱉어 버
2007년 9월 25일 모 일간지에 “교육부, 공무원 비위 진정민원 최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지난 2004년 이후 소속 공무원에 대한 비위 진정민원이 가장 많았던 부처는 교육부라고 당당하게 발표한 기사는 교육자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 수 있을까? 24일 국회 행정자치위 소속 한나라당 김정권 의원에게 제출한 `최근 4년간 부처별 공무원 비위관련 진정민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4년부터 2007년 현재까지 접수된 134건의 공무원 비위 관련 민원 가운데 교육부에 대한 민원이 22건(45명)으로 가장 많았다. 따지고 보면 1년에 5건 정도의 수치에 지나지 않으나 한 건 한 건의 강도가 어떠하냐가 문제다. 교육자는 고운 양심이 일등이어야 교육자로서 현장을 지켜가면서 교육부의 사건 사고를 지켜보아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할 때가 많다. 교육 국장이 인허가에 관련되어 파면되는 보도를 들을 때면 교육자이기에 부정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에 주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부의 수장에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 그래도 조심은 해야 할 것인데 하는 마음에. 안타까울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주 사회에서 어느 부서고 간에 부정 없는
지금은 대학 수시 학기로 각 고등학교별로 대학 원서를 작성하는데 여간 고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학생이 대학 지원을 심지어는 10곳을 넘기는가 하면 붙고 보자는 식으로 자신의 실력으로는 지원할 수 없는 대학도 소위 배짱으로 밀어붙이는 사례를 흔히 보게 된다. 이런 결과는 궁극적으로 부모들의 사교육비를 증가시키고, 교육부 정책을 비난하는 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서울의 모 대학은 수시 학기의 전형료 수입금이 35억을 넘기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원 횟수 지정은 선택의 자유 제한일까 아담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시장의 질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집배된다고 했다. 수요와 공급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되기 때문에 국가의 개입을 꺼려했다. 이런 경제의 원리를 대학의 수시 학기와 정시 학기에 적용해 보자, 무작위로 수도권에 집중되는 대학 지원 현상을 자제하고 전국에 걸쳐 고른 지원 현상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원 횟수를 줄이는 방안이 정책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과거 삼수생에 대한 제한을 했듯이, 지역적으로 편중되는 대학 지원 현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대학에 지원하는 횟수를 제한하는 방안이 고려되어야 한다.
최근에 터져 나오는 사건 사고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아픈 일은 그래도 교육계에 관련된 가짜 학위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 때 동국대 교수였던 신00 문제다. 대학가의 유행어처럼 돌고 도는 가짜 학위의 풍조는 한국 교육이 낳은 서열화의 그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제한 조건이 붙어 다니는 학력 파문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때 대학가를 소용돌이치게 했던 가짜 학위 문제가 또 다시 동국대 교수 임용 과정에서 권력과 결탁된 청탁 교수 임용이 사실로 드러나 상아탑의 권위를 추락하게 만들었다. 교수 임용에 많고도 많은 청탁의 이미지가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는 현실에서도 겉과 속이 다르게 나타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여고 괴담은 가짜 학위의 며느리 일선 고교에서 성적을 비관해서 학생이 자살을 일으키고, 대학에서는 가짜 학위로 상아탑을 메주탑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학교 교육의 현장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제자리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일선 고교의 교육과정을 과감하게 바꿀 필요성이 제기된다. 고교에서는 학생들의 학력을 평가하기 위해서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정해 놓고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시험을 지필 위주로 평가하
학생들에게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질문해 보면 학생들은 참으로 아리송한 반응을 자아낸다. 1학년에게 물어보면 “잘 몰라요” “수능이 나오면 그때 생각해 보고요”라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2학년에게 물어 보면 “그냥 대학 가요” “수능만 잘 보면 되지요” “내신은 별 신경 안써요”라고 대답을 한다. 3학년에게 물어보면 “수시로 갈 게예요” “내신 성적이 안 되어 정시로 갈 거예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이처럼 학생들 각자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어쩔 수 없이 공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절 수 없이 대학을 간다는 경우도 너무 쉽게 대답을 한다. 한 학생의 진로를 이렇게 스스로 결정지어 버리는 이면에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이들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2007년 8월 27일 “세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8월 26일 국회 교육위원회 이경숙 의원(대통합민주신당)이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받아 분석한 ‘고교 2∼3학년, 진로·직업 과목 운영 현황’에 따르면 “전국의 2172개 고교 가운데 진로·직업 과목을 개설해 운영하는 학교는 54.2%인 1178개교에 불과했다. 특히 일반계
2007년 9월 6일 저녁 8시. 모 방송국 뉴스를 듣고 있노라니 대리모에 대한 보도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옛 씨받이를 연상할 정도로 현대판 씨받이 대리모는 중국인들이 불법으로 행하는 데 성업 중이라고 한다. 자기의 씨앗으로 자식을 얻겠다는 몸부림인지 아니면 성의 유희를 즐기면서 자식을 얻으려는 것인지 어느 것이 우선인지 그 답은 차라리 독자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교 교육이 우선인지, 학원 교육이 우선인지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고 공부를 해야 할 지는 굳이 학생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다. 배움의 기관 다변화, 학교 교육 대리모 역할로 드러나 교육에 주종 관계를 굳이 교사와 학생이라는 이등분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 교육 기관이 공식적으로 학교로 한정되어 있을 뿐이지 사실은 배움의 주된 터전은 학원이나 과외 교사에 더 의지하고 있다. 만약 학교에서 졸업장을 주지 않는다면 그 누가 배움의 터전이라고 하여 학교에 수강을 하겠는가하는 생각조차 든다. 방과후학교를 통해 자신이 부족한 과목을 채워주겠다고 하여도 배움보다는 차라리 자율학습을 하겠다고 하는 학생들도 꽤나 있다.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도 그리고 알아도 교사의 간섭을 받기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를 읽어 가다 보면 부패정권에 대한 과감한 저항은 주인공 건우 할아버지 조상의 선비정신을 통해 나타난다. 선비 정신을 지켜온 건우 할아버지의 바른 정신은 결국 모래톱 마을을 송두리째 독식하려는 부패 관리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폭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고 한, 김수영의 시 “폭포”에서도 바른 정신의 길은 부패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펼쳐진다. 부패 의식을 청산하고 혁신하는 길이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 바탕에는 주체성 있는 선비정신이 흘러야 한다. 바른 시민 의식은 교육이 바로 서는 데서 사회의식이 나타나고, 바른 행정 또한 바른 행정 모니터 요원들에 의해서 통제되고 교정되어 가야 한다. 우리 시대의 선비는 교사 정신이다 교육이 과도기를 달려가고 있는 이 때 청산과 혁신은 이 시대의 영웅으로 돋보이는 단어들이다. 썩은 것을 과감하게 도려내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혁신을 부르짖으면서 겉으로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도 시대정신을 걸러가고 싶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선비의 혼령이
교육 칼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글의 대부분이 부드럽다. 그리고 잔잔하다. 파고가 없기에 밋밋한 느낌마져 준다. 교육계에 관한 많은 사건 사고가 있지만, 그 사건을 기사화해 내기에는 여전히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있는 듯하다. 교육 현장에서 교실을 들여다보아도 학교를 관찰해 보아도 어딘지 옛 교육의 구수한 냄새보다는 고도의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세련미와 자유 발랄한 품격을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속에서 현대판 교육은 지식을 전수하면서 동시에 지식에 메스를 가하여 비판식 토론 교육을 통해 대상에 대한 옳고 그름을 밝혀 나갈 때 학생들의 그릇된 태도도 고쳐지지 않을까? 참다운 비판 교육되살아나야 수업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착각을 할 정도로 학생들이 비판적일 때가 많다. 혹 그래서너무 가혹하게 대하기에 그런가 하여 완화하는 태도를 취하면 학생은 교사를 조롱하려고까지 한다. 학교에 대한 비판이 높아서인가 하여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교사에 대한 불만이 높아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해 본다. 그것도 다른 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니 것 같다. 학생들이 비판적 시각으로 사고가 뻗어가는 것은 어느 하나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불만은 아니다. 이들의 불만
교육이 해를 거듭할수록 수요자 중심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위상이 점점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벗어나는 상황에까지 접근하고 있는 느낌이다. 교사 중심의 교실 교육이 학생 중심의 교육으로 변화되어 가는 현실에서 학생들의 자질과 태도에 따라, 진로 적성 검사를 토대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안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하고는 쉽다고 하지만 지방에 소재한 대학이라 꺼리고, 서울에 소재한 대학이라 점수가 낮아 갈 수 없어도, 서울에 가까운 대학을 먼저 선택하고 학과를 뒤에 결정하는 학생들의 마음가짐이 적성 교육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고교 현장이라고 하면 그 누가 부정할까? 대학 레벨이 학생의 학과를 결정한다 아무리 적성이 자신의 위상에 어울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대학의 레벨을 중시하는 한국 학부모의 유교 관념이 변화를 거듭하지 않는 한, 지방 대학에 꽤나 좋은 과가 설강되어 있더라도 우수한 학생이 쉽게 선택을 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서울의 문화 집중화, 권력의 중앙집권화, 유수 대학의 서울 집중, 각종 편의 시설의 서울 집중은 배움을 갈망하는 학도들의 서울 집중을 불식시키
수업을 할 때마다 교실의 창을 통해 보이는 푸른 하늘의 해맑음을 가끔씩 연상하게 된다. 엘리트 학교라는 과학고나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가르쳐 본 경험은 없으나,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도 강의를 해 보았다. 해를 거듭하면 할수록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특히 대학 입시에서 중요시되지 않는 교양과목 시간에는 학생들의 모습이 마치 자기들의 세상이라고 해야 할까? 교사의 강의를 듣기보다는 차라리 자기들끼리 공부를 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치는 것도 요즘 학생들이 오로지 점수 획득만을 위해 공부하는 경향으로 비춰진다. 이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자꾸만 해를 거듭할수록 교육 경력은 풍부해져 분필 하나만 있어도 수업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하게 되는데, 내 마음같이 학생들은 따라주지 않는 것 같다. 교양과목은 대입 점수과목의 판타지 학교의 수업시간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묘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다른 교사들의 수업을 살펴보기 위해 일부러 교실을 돌아다닐 수는 없지만,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이 교양과목으로 취급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학생들의 반응은 다를 수 있다. 들어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교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우문을 굳이 던질 필요는 없지만, 교직에 몸담고 있는 현장 교사로서 자꾸만 교육에 대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요즘 학생들을 보면서 지나간 세대에 대한 향수에서 나오는 어설픈 질문일까? 아니면 참된 교육자가 되고파서 자신이 정한 잣대에 교육이라는 단어를 꿰맞추기 때문일까? 이런 저런 향수가 시야를 스쳐가는 것은 그래도 교단을 지켜가는 가련한 한 교사로서의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양심의 소리가 멀어져 가고 옛 도덕이라는 틀조차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래도 교단에서만이라도 희미한 양심의 소리를 통한 양식있는 사고인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바른 교육자의 소신이 아닐까? 교육자는 바른 교육을 통해 바른 소리를 듣는데 있어야 “교육이 어렵다” “자식을 기르기 어렵다”라는 말을 말로만 들으면서 커 왔던 지난날의 일들을 돌이켜 보면, 정작 교단은 누구의 소리에 의해 누구에게 소리를 전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언뜻언뜻 든다. 사실 현장 교사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다. 교사이기에 그리고 한 해 두 해 세월을 보내는 입장에서 교육이라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 이로움을 너무 많이 주고 있다. 그에 반해 나쁜 점도 많다. 나라는 부력으로 국민의 삶을 드높이고, 사회는 여러 편리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어 생활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만나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통해 화상으로 서로를 보게 되는 유리창 속의 장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학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교실에서는 인간 교육이 부활되어야 교실 교육이 가면 갈수록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미진한 면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욕구불만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전천화된 교육이라고 해도 아직도 현장의 교육은 주입식의 틀을 완전하게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학생들의 흥미위주의 수업을 충족시키기 위한 교사들의 자구지책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현실이지만 교사들의 수업연구를 위한 시간의 부족은 여전히 방과후교육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 시간의 수업이 예전에는 주입식으로 전개될 때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들의 인터넷 예습에, 과외에, 학원에 등등으로 이들의 학습량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도 무시할 수는
사람이면 누구나 태어나 학교라는 문턱을 밟기 마련이다. 물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기는 하나 인간이 배움을 떠나 인간으로서의 자아성취를 이루어 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믿음직하게 우뚝 선 학교에서 자애스러운 선생님의 품안에서 꿈을 가지 학생들은 오늘도 자신의 부푼 희망을 가지고, 달려가는 열차마냥 쉬는 시간에도 수업 시간에도 저마다 무언가를 보고 쓰고 그리고 읽곤 한다. 꿈은 무의식을 의식으로 펼쳐가는 단계 사랑은 꿈을 싣고, 꿈은 희망을 갖게 하고, 희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호연기지를 갖게 한다. 산을 찾아 산 아래서 우뚝 선 산봉우리를 쳐다보면 언제 저 산 봉우리에 올라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을 두고 오르다 보면 어느 새 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정상을 오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출발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달하게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숨쉬는 곳에는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들이 모여들게 된다. 아침 출근을 할 때마다 소형 승용차를 타고 몇 분 되지 않는 길을 올 때마다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시사 정보들이 쏟아져 나올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생활
최근에 일찍 귀가할 시간이 많아져 우연히 TV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그 드라마가 “강남 엄마 따라잡기”였다. 몇 번을 보고 있자니, 이것은 교육의 풍자 드라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교육 바로잡기도 좋고, 교육에 열정도 좋다. 그러나 교육을 지나치게 풍자로 이끌어 냄으로써 교육에 대한 새로운 개혁의 이미지를 주기보다는 이미 지나간 일들을 가지고 교육의 흠집내기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에 새로운 비전을 드라마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라면 시청자로서 비판을 하지 않을 것이나 옥에 티 정도를 가지고 교육의 전반을 재조명 한다는 의미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어딘지 모르게 생각의 여지를 남기게 한다. 드라마는 신명나는 살풀이로 엮어져야 교육에 살이 끼었나 드라마조차도 무당의 살풀이 파노라마인지, 시청을 하고 있자니 흥미진진한 맛을 풍겨내는 것이 상업성을 노린 시청률 확보에 있지 않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교육자가 드라마를 시청하는 입장과 학부모가 드라마를 시청하는 입장의 차이는 어떻게 다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교육자는 교육의 흠집내기에 화를 낼 것이고, 일반인은 교육자의 새로운 반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찬성할 지 모른다. “역사란 무엇인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