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단종 장릉+ 장릉과 국장재현 장릉은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시설물이 있습니다. 장판옥(藏版屋)과 배식단(配食壇)이 그것입니다. 장판옥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의 뜻을 따랐던 이들의 위판을 모신 곳입니다.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사육신, 엄흥도와 같은 충신 32명을 포함해 모두 268인을 모셨습니다. 배식단은 장판옥에 모셔진 위판을 올려 두고 제향을 올리는 제단입니다. 해마다 영월에서는 한식을 전후해서 단종문화제를 개최하는데 이곳 장릉에서 단종제향과 함께 충신들을 위한 제향도 함께 모십니다. 영보전 안에는 작고하신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단종 영정이 있습니다.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하는 내용이지요. 어느 날 추익한이 꿈을 꾸었습니다. 평상시처럼 산머루를 진상하려고 단종을 찾아가는데 곤룡포와 익선관 차림에 백마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는 단종을 만났답니다. 깜짝 놀라 행선지를 물으니 단지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만 남기곤 사라져 버렸다네요. 추익한이 서둘러 관풍헌으로 갔더니 이미 단종이 승하한 뒤였답니다. 영보전에서 다시 돌아 나와 오른쪽으로 난 길을 올라 능침을 향합니다. 능침에 닿기 전에
충절의 고장 영월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었습니다. 그늘에 있어도 땀이 죽죽 흘러내리는, 정말 인내를 시험하는 여름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부 지역에는 폭우가 쏟아져 큰 피해를 봤습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그렇게 기상 변화가 들쑥날쑥 했습니다. 얄밉게 심술부리던 자연은 그래도 우리에게 가을을 보내 주었네요. ‘인간들이여, 자연과 대화하고 소통해서 공존하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조건으로 가을을 보내준 듯합니다. 조선 왕릉을 찾아가는 길, 이번 호에는 장릉을 찾아갑니다. 조선 왕릉 중 장릉은 모두 세 군데 있는데요, 오늘 찾아가는 장릉(莊陵)은 제6대 단종의 릉이죠.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강원도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기도 합니다. 장릉이 있는 영월에는 재미있는 면(面) 이름이 보입니다. 김삿갓면, 한반도면, 주천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 2009년 10월에 영월군은 김삿갓 유적지가 있는 하동면을 김삿갓면으로, 한반도 모습의 지형이 있는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바꾸었습니다. 단순히 방향을 나타낸 데서 벗어나 지역 특색을 살려 명품브랜드화하려는 시도입니다. 주천면은 술이 끊임없이 솟아난다는 주천(酒泉)에서 유래합니다. 양반이 마실 때는 샘물이 약주가 되고, 상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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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릉과 건릉 이번 호에서는 경기 화성에 있는 융건릉을 찾아갑니다. 융건릉은 조선 왕릉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융건릉은 아버지와 아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융릉은 사도세자로 알려진 추존 장조와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의 합장릉이고, 건릉은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김 씨의 합장릉입니다. 잘 알다시피 장조는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22대 정조의 생부입니다. 다방면에서 부왕인 영조의 기대를 듬뿍 받았던 그는 영조의 명에 의해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 노론 측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결국 1762년 5월 나경언의 상소로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습니다. 당시 세자의 나이 28세였고 정조는 11세였습니다. 정조는 비명에 간 생부 사도세자를 위해 조선 최고의 명당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화산(花山) 아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도성으로부터 88리에 위치해 있어 왕릉이 8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되어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수원을 80리라고 명하노라’하는 어명으로 논란을 잠재웠습니다. 그리하여 1789년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