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국제적, 중립적 관점에서 한국전의 위상, 영향 등 기술
中 북한 원조요청, 미국 내정간섭 등이 중국군 개입 명분
?전쟁주체 미국·남한으로 왜곡, 김일성 영웅적 역할 부각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은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식민통치와 군사적 점령이 종식됨을 의미했다. 그것은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과 국가주권 회복의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동아시아 사회는 제국주의 국가 ↔ (半)식민지 국가의 대결구도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미국・한국・일본과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중국・북한・소련 사이의 첨예한 대결구도, 즉 냉전체제로 바뀌었다. 냉전구도의 첫 신호탄이 쏘아진 곳은 한반도였다. 한국전쟁은 한민족만의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한 ‘국제전’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남북한의 분단이 고착화되었고 남북한의 소모적인 대립도 격화되면서 한민족의 역량은 반감되었다. 반면에 한반도에 대한 주변 강대국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동아시아 냉전의 서곡이자 산물인 한국전쟁은 분명 우리 민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은 남한사회의 구조화된 계층 간・지역 간 이동을 강제함으로써 상대적인 균형사회를 앞당겨주었고, 이념대결과 동족상잔의 대결이 민족의 장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역사적 교훈으로 각인시켜주고 있다.
한국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세계사적 관점의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보다는 일국사(一國史)적 관점이 농후한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는 ‘6・25전쟁의 원인과 그 영향은’이라는 독립된 장을 설정하고, 한국전쟁의 배경으로 ㉮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김일성 등의 독재체제 구축과정, 토지개혁 법령과 중요 산업국유화 법령 등을 통한 북한의 공산화 추진 및 공산정권의 수립과정 등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 북한 공산정권이 소련과 비밀군사협정을 맺고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남침준비를 서둘렀는데, 남한에서는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각종 소요사태와 파업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고 정당과 사회단체의 난립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다는 점을 서술하고 있다.
わたしたちの中學社會, 일본서적 평성 14년 197쪽
피난을 위해 한강에서 배를 기다리는 서울 시민의 풍경(1951년 5월)
그런데 ㉮ 부분은 남북분단 과정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한국전쟁 발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될지는 몰라도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못한다. 만일 ㉮ 부분을 굳이 한국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으로 분류하고자 한다면, 북한에서의 공산체제 구축과정과 아울러 남한에서의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의 자본주의 체제 구축과정도 같이 다루었어야 했다. 만일 한국전쟁의 원인을 직접적인 원인으로만 한정한다면, ㉮ 부분은 한국전쟁의 전사(前史)가 아닌 남북분단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다루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 부분은 당연히 남북분단 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에 포함시켜야 했다. ㉯ 부분 역시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어쩌면 ㉯ 부분은 북한정권의 남침의도를 부추긴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결국 한국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장(章) 제목으로 ‘6・25전쟁의 원인과 그 영향은’이라고 설정해놓고 정작 본문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결과만을 별도의 소절(小節)로 설정하고 그것만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한국의 중학생들은 역사 교과서만으로는 한국전쟁이 왜 발생했는지, 국제연합이 왜 남한을 지원했고 중국이 왜 북한을 지원했는지, 당시의 국제정세가 어떠했는지, 한국전쟁이 당시의 국제관계 속에서 어떤 성격과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 궁극적으로 한국전쟁이 한반도 및 일본 그리고 동북아 국제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방법이 없다.
북한의 고교 교과서에서는 한국전쟁을 ‘정의의 해방전쟁’으로 규정한 뒤, “오래전부터 침략전쟁을 준비하여 온 미제침략자들과 그 앞잡이 놈들은 1950년 6월 25일 드디여 공화국북반부를 반대하는 침략전쟁의 불을 질렀습니다. 이날 이른 새벽 38도선을 넘어 공화국북반부에 쳐들어 온 놈들은 단숨에 북반부를 삼켜 보려고 미친 듯이 날뛰면서 전쟁의 불길을 더욱 넓혀나갔습니다.”라고 하여, 미국과 남한이 ‘북침’하면서 한국전쟁을 ‘먼저’ 일으킨 것으로 왜곡 기술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한국전쟁의 의의를, “미제침략자들은 우리 조선인민 앞에 끝내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제의 거만한 코대를 꺾어 놓았으며 력사상 처음으로 미제의 내리막길의 시초를 열어 놓았습니다. 이 승리는 조선인민의 투쟁력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세계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할 것입니다.”라는 김일성의 교시로 대신하고 있다.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한국전쟁을 ‘조선전쟁’으로 지칭한다.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에 대한 언급 없이 전쟁 발발의 원인을 ‘냉전’으로 파악한다. 일본 교과서에서는 1950년 6월 북조선이 무력통일을 목표로 ‘남하(南下)’한 것을 계기로 조선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여 ‘남침’이라는 표현 대신에 ‘남하’라는, 다분히 북한을 의식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국제전 성격과 관련해서는 “국제연합은 북조선에 대한 제재를 결정하고 미국군을 주력으로 한 국제연합군을 출동시켰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의용군을 북조선에 보내 원조했다. 이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는 것을 우려한 세계인들이 휴전을 외치는 움직임 속에서 1953년 휴전협정이 성립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왜 국제연합과 중국이 각기 남북한을 지원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한국전쟁 지도 중학교 교과서, 2004, 305쪽
일본 교과서에서는 한국전쟁이 일본 및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첫째 국제연합군, 특히 미국은 일본을 비군사화・민주화된 국가로 만들기보다는 안정된 자본주의 국가로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방벽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배상계획을 포기하고 독점금지법을 개정해서 대기업 활동에 대한 제한을 완화시켰으며, 경찰예비대의 설치를 일본정부에 명했다. 둘째 미국은 조선반도에 출동하기 위한 전진기지를 일본에 두고 대량의 군수품 등을 일본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일본은 특수한 호경기를 맞게 되어 전후의 불경기에서 벗어나 부흥을 앞당기게 되었다. 셋째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역할을 중시하여 일본의 독립을 서둘러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회의를 열고 일본의 독립을 승인했다.” 결국 한국전쟁이 한반도의 한민족에게는 엄청난 재난을 불러왔지만 일본에게는 경제부흥과 정치적인 국가주권의 회복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정작 한국전쟁의 당사국인 한국의 중학교 교과서에서도 밝혀주지 못한 한국전쟁의 국제적 영향이나 역사적 의미를 일본 교과서에서는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1950년 여름에 조선내전이 폭발하였다”고 하여, 한국전쟁을 ‘조선내전’으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한 원인뿐만 아니라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지(즉 북한의 남침사실)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중국 교과서에서는 “미국은 신속히 무력으로 조선의 내부 사무를 간섭하였고 얼마 안 지나서 미군을 위주로 하는 유엔군을 조직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길을 중국과 조선의 변경에까지 끌고 왔다. 동시에 미국의 제7함대도 대만해협에 들어와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위급해진 조선의 국세(國勢)는 중국의 안전을 엄중히 위협하였다.”고 하여, 미국 주도 유엔군의 상륙과 남한 원조를 ‘침략’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미국의 대만 방위 조치를 중국 내정에 대한 간섭으로, 유엔군의 북진을 중국의 안전에 대한 엄중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중국 교과서에서는 보충 설명 란을 만들어 미국이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를 조종하여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조선 침략군을 조직해서 유엔군이라는 명의로 조선침략전쟁을 확대했다는 점, 중국정부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한 채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서 북진했으며 미국 공군이 중국의 영공을 침범하고 중국 동북 변경지구를 폭격했다는 점을 들어 미국의 침략행위와 부당성을 성토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북한의 남침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미국의 ‘조선침략’과 그것이 중국의 안전에 위협을 가했다는 점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다. 또한 한국전쟁을 ‘조선내전’으로 규정하면서도 한국전쟁이 지닌 ‘내전적 성격’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미국의 개입만을 성토하고 있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원인을 북한의 원조 요청 이외에, “(중국정부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원조함)와 보가위국(保家爲國)하기 위해…중국인민지원군을 조선에 보내 조선군민과 어깨를 같이하여 미국 침략자에 대항하고 그들을 격퇴하여 38선 부근으로 내몰았다.…항미원조전쟁은 미군의 실패로 말미암아 승리로 끝났다.”고 하여, 항미원조와 중국 자체의 보가위국에서 찾고 있다. 이와 아울러 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보충 설명란을 통해 “미국 침략군이 조선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강대한 군대가 압록강변에 이르면 중국은 안정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사업을 벌일 수 없고 국내외적으로 반동적 기운이 팽창하여 중국과 동방 각국에 불리하다는 점, 조선의 존망과 중국의 안위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됨), 호파당위(戶破堂危 사랑채에 불이 나면 안채가 위태롭게 됨)의 관계이기 때문에 중국정부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전략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침략’으로 규정했듯이, 당시 남한이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개입 역시 ‘침략’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미 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전쟁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 조선의 독립과 중국의 안전을 보위하였고 중국의 국제적 명성을 제고시켰다는 점, 중국이 경제를 건설하고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안정된 평화적 환경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요컨대 한국 교과서는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나 영향 등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일국사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다. 북한 교과서에서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체를 미국과 남한으로 매도하면서 전쟁과정에서의 김일성 대원수의 영웅적인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서는 한국전쟁을 국제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에서 한국전쟁의 위상과 국제적 영향 등을 차분하게 다루고 있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북한의 남침사실을 적시하지 않고 미국의 개입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 명분을 북한의 원조 요청과 미국의 중국 내정간섭 및 안전위협 등에서 찾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을 일국사적인 내전과 국제사적인 ‘항미원조전쟁’으로 동시에 파악하고 있다.
/윤휘탁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