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토지를 읽는다는 것은 수많은 문제투성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물과 사건의 맥락을 파악하고, 왜 읽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 프로젝트의 본질입니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는 구한말부터 광복까지 민족사를 아우르는 한국 문학의 대표작이지만, 2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탓에 완독이 쉽지 않은 작품으로도 꼽힌다. 그런데 입시 준비로 바쁜 고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 대서사를 매주 한 권씩 읽어 내려가는 교사가 있다. 경기 백영고 김환(사진) 교사다.
김 교사와 ‘토지’의 각별한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문학 전공자로서 ‘토지를 읽지 않고 졸업하는 것은 수치’라는 오기로 소설을 접했고, 방영 중이던 드라마와 원작 소설을 비교하는 졸업 논문을 썼다. 40세가 되던 해에는 소설 속 인물 ‘김환(구천이)’의 이름을 따서 개명까지 했다. 젊은 날 과오를 딛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의 삶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토지 읽기를 시작한 것은 2016년 무렵. 학생부종합전형 도입 초기에 차별화된 독서 프로그램을 고민하던 중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할 긴 작품으로 차별화를 하자”는 발상이었다. 방대한 프로젝트에 도전할 학생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첫 설명회에 교실을 메울 만큼 학생들이 몰렸다.
프로젝트의 기본 원칙은 엄격하다. 400~500페이지 분량의 책 20권을 매주 한 권씩 완독해야 한다. 매주 2시간 토론과 1시간 감상문 작성까지 총 3시간의 정기 세미나 참여, 20편의 감상문을 제출해야 과정을 이수할 수 있다. 중간·기말고사 전후 기간과 방학을 빼고 쉼 없이 달려야 1년에 20권을 완독할 수 있다.
김 교사의 역할은 페이스메이커다.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처음부터 새로 읽으며 대장정을 함께한다. 몇 번이나 완독한 책을 매년 처음부터 다시 보는 게 쉽진 않지만, 학생들을 독려하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다.
학생들이 막판에 몰아서 읽지 않고 꾸준히 내용을 곱씹을 수 있도록 하루 60~80페이지씩 분량을 정해주고 매일 진도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낯선 방언과 인물 관계 파악이 어려운 1권의 고비를 넘기도록 이끄는 것이 핵심이다. 작품의 배경인 경남 하동 평사리, 박경리 작가의 생가가 있는 원주로 떠나는 문학 답사는 이 프로젝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선발 과정을 거쳤던 예년 프로그램의 이수율은 95%에 달했다. 긴 여정이지만 매년 프로그램 참가자 20명 중 한두 명을 뺀 대부분의 학생이 완주했다. 그런데 올해는 ‘신나는 공유학교’ 프로그램에 선정되면서 선착순 모집을 한 결과 20명 중 절반 정도가 중도 포기했다. 그래서 내년에는 학생의 의지를 확인하는 선발 절차를 부활시킬 계획이다.
코로나19를 계기로 ‘토지 프로젝트’는 한동안 중단됐었다. 매년 프로젝트를 쉼 없이 반복하는 게 힘에 부치기도 했다. 그러다 올해 초 통영 가족 여행에서 박경리 묘소를 마주하고 재개를 결심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올해가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김 교사는 토지 읽기의 효과로 ‘학업 자신감’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을 꼽았다. 성인도 완독하기 힘든 분량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크고, 수능 문학 지문이나 긴 텍스트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준다는 설명이다. 또한 소설 속 700여 명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간접 경험하며 삶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시야를 얻을 수 있다. 작품을 통해 배운 역사, 심리, 정세, 범죄 등 인간 사회의 총체를 학생부에 잘 녹여내면 수시 전형에서도 독창적인 강점이 된다.
올해는 경기도교육청 공모 사업인 ‘신나는 공유학교’ 프로그램(‘AI 시대, 그래서 나는 토지를 읽는다’)에 선정돼 타 학교 학생도 참여할 수 있었다. 덕분에 교육청 지원이 이뤄지고, 이수 결과는 학교생활기록부 교과 세특(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심화 활동 근거로 연계된다. 김 교사는 향후 경기도 내 여러 지역으로 토지 프로젝트가 확산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내년부터는 여러 교사들과 토지를 읽고 수업 방법 등을 공유하는 모임도 운영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