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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일제시대에도 대학 입시전쟁 치렀다"

대입명문 경성중-용산중-경성제일고보 순

일제 시대 한반도의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 입시를 위한 경쟁과 '고교 서열화'가 요즘 못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사회학과 정진성 교수는 21일 경성제대의 입시 제도와 학생 구성, 출신학교별 입학생 수 등을 분석한 '경성제국대학의 입학 및 졸업 기회의 차등적 배분' 논문을 발표했다.

일제가 1924년 서울대병원이 현재 위치한 종로구 동숭동에 건물을 세우면서 조선 지역의 '최고학부'가 된 경성제대는 예과와 법학부ㆍ의학부ㆍ이공학부 등을 차례로 신설했으며,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에 따라 지금의 서울대로 바뀌었다.

정 교수가 '경성제대 학생명부' 등 당시 자료들을 수집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924년 한국 최초의 대학입시인 경성제대 예과(豫科) 시험에는 647명이 응시해 조선인 44명과 일본인 124명 등 총 168명이 합격해 4대1에 육박하는 경쟁률을 보였다.

대학 본과(本科)의 예비 과정으로 개설된 예과는 지금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3학년∼대학교 1ㆍ2학년에 해당하며, 예과 입학생 대부분이 2년 뒤 본과로 진학하게 돼 예과 입학시험이 사실상의 대학 입학시험인 셈이었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경성제대 입학생을 많이 배출해 낸 명문고들을 정점으로 한 '고교 서열화'도 이 때부터 본격화됐다.

정 교수는 "1924∼1937년까지 경성제대 예과 입학생의 출신 학교를 알아보니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가 압도적인 차이로 줄곧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경성중은 연평균 30명이 넘는 경성제대 합격생을 배출해 14년 동안 430명을 경성제대에 입학시켰으며, 252명(연평균 18명)의 합격생을 낸 용산중학교(현 용산고등학교)와 합격생 182명(연평균 13명)을 배출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가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1934년 경성중은 5학년 생도 176명 가운데 36명이 경성제대에 입학해 졸업생 대비 합격생 비율이 20%를 넘었으며, 용산중과 경기제일고보가 각각 11%와 10% 수준으로 그 뒤를 잇는 등 합격률 서열도 대체로 비슷했다.

정 교수는 "1937년까지 중학교는 일본인 학교로 고등보통학교는 조선인 학교로 나누는 '민족 분리 교육' 정책이 시행됐고, 경성제대 입학생의 일본인ㆍ조선인 비율을 대략 3대1로 유지하며 조선인 응시생은 별도로 신분조사를 받게 하는 등 차별 정책이 엄연히 존재했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같은 내용을 20일 서울대 규장각에서 서울대와 동경대, 대만사범대 등 동아시아 지역 대학 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식민권력과 근대지식: 경성제국대학연구'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다.

심포지엄을 기획한 사회학과 정근식 교수는 "그동안 경성제대 교수 개인이나 특정 학문의 역사에 관한 논문은 몇 차례 발표된 적이 있지만 경성제대의 설립ㆍ구성ㆍ운영ㆍ연구 등 제반 사정과 역사를 다룬 연구는 이번이 처음이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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