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실시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등급제의 불합리성을 토로하는 수험생, 학부모들의 불만은 사그라지지 않은채 거의 '분노'에 가까운 상태로 증폭되고 있고 일각에서는 벌써 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 자신의 수능등급을 확신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수능이 필요없는 수시입학 전형에 몰리면서 일부 학교는 경쟁률이 100대 1을 넘기는 과열양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각 대학이 내신 반영률 격차를 무의미하게 만들면서 고 3 수험생들이 기말고사는 팽겨친채 논술 준비에 올인하는 현상이 벌어져 이제 '논술이 본고사'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 등급제 왜 논란인가 = 2008학년도 대입에서 새로 도입된 수능 등급제는 학생들의 수능 성적을 예년처럼 원점수와 표준점수, 백분위 등은 전혀 공개하지 않고 오로지 등급만으로 표시하는 제도다.
단지 1~2점 차이로 등급이 매겨지는 서열화의 폐단을 막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것으로 일정 점수대의 학생이면 모두 같은 등급으로 분류하는 방식으로 돼 있다.
서열화의 폐단을 막는다는 '이상'은 바람직해 보이지만 문제는 등급제 역시 불과 1~2점 차이로 등급이 갈리는 또다른 '폐단'을 야기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1등급을 구분하는 커트라인 점수가 91점이면 90점을 맞은 학생은 불과 1점 차이로 2등급으로 내려가게 된다.
즉 100점과 91점은 무려 9점 차이가 나는데도 같은 등급이 되고 91점과 90점은 불과 1점 차이인데도 다른 등급이 되는 모순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이 수능 등급을 최저학력기준으로 활용하거나 영역별 등급을 기준으로 해 학생들을 선발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수험생들은 불과 1~2점 차이로 달라지는 등급 때문에 지원 가능 대학 범위가 달라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더욱이 수능 각 영역의 총점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등급 커트라인에 걸려 낮은 등급을 받게 되면 오히려 더 불리해지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예를 들어 A학생은 언어, 수리, 외국어영역에서 각각 100점, 100점, 90점, B학생은 91점, 91점, 91점이라면 총점으로는 A학생이 290점으로 B학생(273점)보다 17점이나 높지만 등급으로 환산하면 A학생은 1-1-2등급, B학생은 모두 1등급이 돼 결국 B학생이 더 유리해지는 기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등급제가 과연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도 논란거리다.
특히 올해 수능 수리영역 중 수리 가형의 경우 쉽게 출제되는 바람에 학생들의 평균 점수가 대폭 올라 불과 1문제만 틀려도 바로 2등급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오면서 변별력 확보에 대한 우려도 그 어느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 등급제 폐지 요구 '봇물' = 이렇듯 수능 등급제의 불합리성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면서 등급제가 본격 시행되기도 전에 이미 수험생, 학부모들 사이에서 등급제를 폐지하라는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각종 포털 사이트 게시판을 비롯해 교육부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수험생, 학부모, 교사들의 글로 도배되고 있는 상황이다.
교육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김행미씨는 "1~2점으로 합격, 불합격이 결정되는 폐단을 막겠다고 도입한 등급제가 오히려 1~2점으로 합격 불합격을 결정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학생들의 원점수를 공개해 혼란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만석씨도 "문제 하나 차이로 등급이 갈려 지원 대학이 서울이냐 수도권이냐로 달라진다"며 "수험생들의 피를 말리는 등급제는 당장 폐지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학교 기말고사 실종..논술 올인 = 현재 대부분의 고교가 기말고사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수험생들 사이에 내신보다는 논술에 '올인'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정상적인 수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울 정의여고 3학년 최모양은 22일 "서울 상위권 대학들이 대부분 정시모집에서 논술시험을 치른다"며 "수리 가형에서 한 문제 틀렸는데 2등급으로 떨어질까 봐 불안해서 이틀에 한 번씩 논술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기말고사보다는 대학별 고사에 집중하는 것은 이번 기말고사가 고등학교 1~3학년 과정 총 12번의 시험 중 마지막인데다 대학들이 내신의 영향력을 줄인 입학전형을 속속 발표하면서 학생들 사이에 내신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는 분위기가 퍼져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동덕여고 3학년 한 담임교사는 "학생들이 기말고사보다는 온통 수능 등급과 논술에 신경이 집중돼 있는 것 같다"며 "정부는 이번 입시에서 내신에 큰 비중을 뒀다고 강조하지만 사실상 중상위권 대학 지망 학생들은 내신보다 수능이나 논술로 합격이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학교와는 반대로 주요 입시학원의 논술대비반에는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수험생들이 꽉꽉 들어차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강남 중앙학원 상담실장 이모씨는 "올해는 중하위권 대학들도 논술을 실시하다 보니 논술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높을 수 밖에 없다"며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학생이 몰린 것 같다"고 전했다.
중계동 학림학원은 수능이 끝난 뒤 16일부터 수시 2-2 전형 대비 논술반 구성을 시작했으나 워낙 많은 학생들이 몰려와 반편성을 추가로 해야 했다.
학원 관계자는 "수능에서 한두 문제 차이로 등급이 한 단계 내려가면서 목표 대학에 지원조차 못한 학생들이 수두룩하다"며 "정시에 대한 불안감이 퍼지면서 논술에 더더욱 매진하는 추세다"고 말했다.
◇ 수시 전형 응시자 폭등 = 수능성적에 불안을 느낀 수험생들이 수능성적이 반영되지 않는 수시 2-2 전형에 대거 몰리고 있다.
지난 20일 수시 2-2 전형의 원서접수를 마감한 한국외국어대는 126명 모집(서울캠퍼스 기준)에 8천585명이 지원해 68.1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는 지난해 지원율 23.3대1의 3배에 달하는 것이다.
특히 이 대학 언론정보학부와 경영학부는 경쟁률이 100대1을 넘긴 것으로 집계됐다.
앞서 18일 원서접수를 마감한 한양대는 745명을 뽑는 특별전형에 1만 3천968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18.7대1로 집계됐으며 특히 수능성적 없이 논술과 학생부만으로 선발하는 '리더십 우수자전형'은 경쟁률 30.6대1을 기록했다.
22일 원서접수가 끝난 서강대는 417명 모집에 1만9천50명이 지원해 경쟁률 45.7대 1을 기록했으며 숙명여대도 121명 모집에 2천421명이 응시해 2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서울 강북의 K고 진학담당 이모 교사는 "변수가 많은 수능 등급제를 피하기 위해 학생들이 수시전형에서부터 안정, 하향지원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수시 2-2 전형에 지원하려는 학생이 예년보다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