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이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립니다. 건이는 숨을 멈추고 과녁만 노려보았습니다. 가파르게 휘었던 시위가 ‘슈슝’ 튕기는 소리를 내며 화살을 쏘아 올렸습니다. 그 서슬에 이마를 따라 흐르던 조그만 땀방울이 건이의 손등으로 툭! 떨어집니다.
‘이런! 너무 빨랐어!’
화살이 떠나는 순간, 건이는 이미 명중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건이의 눈은 간절함을 담아 화살의 움직임을 좆았습니다.
‘제발, 제발…….’
꽁지를 불안하게 떨며 날아간 화살이 바람에 한 번 크게 휘청입니다. 과녁 바로 앞에서 땅에 처박힌 화살 주변에선 막 꺼진 불처럼 푸시식 흙먼지가 일어납니다. 심판이 붉은 깃발로 크게 가위표를 그렸습니다. 건이는 고개를 푹 떨구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남은 화살 한 대를 명중시킨다 해도 이기기는 틀렸습니다.
“쯧쯧… 이제 끝났군.”
“국궁 신동이 웬일이지?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조그맣게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건이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텐데 건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흘깃 옆을 보니 부산 아이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건이가 앞지르고 있었을 때만해도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더니, 이젠 입가가 헤실헤실 풀어지는 모양입니다.
건이는 남은 한 대의 살을 아무렇게나 쏘아버리고 단을 내려왔습니다.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시던 할아버지가 저벅저벅 건이의 앞으로 걸어오셨습니다. 건이는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외로 꼬은 채 우두커니 섰습니다.
“못난 놈!”
할아버지는 나직하게 내뱉고는 앞서 나가셨습니다. 건이는 말없이 활을 정리하고 할아버지를 따라 활터를 빠져 나왔습니다.
가을 바람이 샛노랑 이파리가 풍성한 은행나무를 스스스 흔들고 지나갑니다. 은행잎 한 장이 팔랑팔랑 날다가 건이의 콧등을 간지럽힙니다. 나무 둥치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있던 건이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활터에 다녀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 후 건이는 한 번도 활을 잡지 않았습니다. 국궁을 시작한 후 삼년 동안 거의 하루도 활을 놓아본 일이 없는 건이입니다.
‘그런 풋내기에게 져버리다니...’
초등학생은커녕 중학생도 하기 어렵다는 국궁을 4학년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주위에선 ‘국궁 신동’이 났다며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아마 어른이 되면 전국에서 제일가는 궁사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건이에겐 당연하게 여겨졌던 일입니다. 일주일 전까진.
부산에도 건이와 동갑내기인 궁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 달 전 쯤의 일입니다. 멀리 부산의 활터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건이의 소문을 들었다면서 그 쪽의 궁사와 친선 경기를 가져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건이는 자신만만하게 경기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스스로를 최고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건이에게 이번 일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국궁을 시작한지 일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국궁 신동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예서 뭐하는 게냐?”
건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어느 새 할아버지가 건이 발치에 서서 건이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옥색 두루마기 위에 활을 매고 계신 걸 보니 활터에 가시려는 모양입니다.
“네 활을 챙겨서 따라오너라.”
건이는 쳐들었던 고개를 천천히 떨어뜨리고는 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저 활터 안가요.”
집안 어른들도 무서워 쩔쩔매는 호랑이 할아버지입니다. 분명히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조용합니다. 건이는 슬쩍 할아버지 눈치를 살폈습니다. 뜻밖에도 노여운 기색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그저 고요하게 건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오너라.”
“…….”
건이는 더 이상 거역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일어나 할아버지 뒤를 따랐습니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활터는 비어있었습니다. 옛 양식으로 지어진 국궁장 의 단청도 가을을 타는지 유난히 울긋불긋합니다. 가을색이 짙은 나무가 푸르르 떨며 마른 잎을 날렸습니다. 금빛으로 물든 잔디밭 저 쪽으로 선명하게 도드라진 과녁이 떡 버티고 서 있습니다. 과녁을 바라보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친선 경기 날이 떠올라 건이를 괴롭힙니다.
‘바람만 안 불었어도 그런 별 볼일 없는 애한테 안 졌을 텐데.’
기운이 다한 것처럼 바람에 휘청거리며 땅에 처박히던 화살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건이는 자신의 활솜씨가 모자라 졌다는 사실을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활을 들어라.”
할아버지의 말씀에 퍼뜩 정신을 차린 건이는 느릿느릿 궁대를 매고 활 시위를 걸었습니다. 저 멀리 붉은 원이 그려진 과녁이 보였습니다.
‘꼭 맞춰야 해!’
건이는 부산 아이와 경기를 하던 그 날처럼 다시 긴장이 되었습니다.
슝-.
화살이 꽁지깃을 파르르 떨며 날아가더니 가까스로 과녁의 끝 부분을 맞추었습니다. 정 중앙을 맞춘 것은 아니지만 일단 맞추었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됩니다. 두 번째 화살을 매길 때였습니다.
“네 활이 언제부터 그리 되었느냐?”
할아버지의 말 끝에 한숨이 묻어납니다. 건이는 영문을 모른 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네 활이 언제부터 그리 작아졌느냔 말이다.”
“……작아지다니요?”
한참 동안 할아버지의 말 뜻을 생각하던 건이가 결국 되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앙상한 손가락으로 건이의 활을 가리킵니다.
“네 활과 화살을 보아라. 언제부턴가 과녁은 고양이가, 너는 그 과녁 앞에 웅크린 쥐가 된 모양이로구나. 그저 빗맞힐까 무서워 벌벌 떨고만 있으니 말이다.”
얼굴이 벌개진 건이가 막 아니라고 소리치려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할아버지의 말이 영 틀린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활이란 본시 전쟁터에서 나온 물건이다. 대담한 기백이 없이 어찌 다루겠느냐.”
할아버지는 궁대를 매고 단 위에 서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대에만 서면 다른 사람이 됩니다. 평소에는 구부정했던 허리도 곧게 펴지고 온 몸에 힘이 넘쳐 보입니다. 나약한 선비가 장수로 변신이라도 하는 듯 합니다.
시위를 깊게 끌어당긴 할아버지는 화살을 높이 쏘아 올렸습니다. 공기 중에서 시위가 퉁기는 느낌이 전해질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쏜 화살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바르게 쭉 뻗어 과녁을 한 참 지난 곳에 떨어졌습니다. 건이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어!”
언제나 백발백중인 할아버지의 화살이 빗나가서가 아닙니다. 건이는 이 광경을 분명 예전에 본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처음 할아버지를 따라 활터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활터는 여러 명의 궁사들이 한참 활을 쏘고 있었습니다. 수 많은 화살이 하늘을 가르며 솟구쳤다가 과녁을 향해 떨어져 내립니다. 건이의 입이 절로 벌어집니다.
“할아버지! 화살이 꼭 물고기 같이 날아가네요!”
“물고기?”
“네. 보세요. 비늘도 반짝여요.”
햇살에 등을 빛내며 또 한 무리의 화살이 날아갔습니다.
“물고기를 하늘 바다에 풀어 놓으니, 물고기 활이라고 불러야겠어요.”
할아버지는 허허 웃음 소리를 내며 활을 꺼내십니다. 시위가 크게 휘더니 화살을 높게 쏘아 올립니다. 화살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을 한 참 넘어 떨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화살이 지나간 흔적을 찾듯 한 동안 먼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네 말이 맞다. 화살은 더 멀리, 더 높이 날고 싶어 하는 물고기다. 그저 힘차게 날수 있도록 놓아주면 그 뿐이지. 과녁에 얽매이면 절대로 큰 궁사가 될 수 없는 법이다. ”
건이는 알쏭달쏭합니다.
“그렇지만 과녁을 못 맞추면 소용이 없잖아요.”
할아버지는 건이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화살을 네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말아라. 자유롭게 풀어놓기만 하면 제 갈 길을 스스로 찾을 게다.”
‘그래. 화살이 스스로 제 길을 찾도록!’
답답했던 가슴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스쳐지나갑니다. 건이는 천천히 화살을 걸었습니다. 멀리 과녁이 흐릿해지고 출렁일 듯 푸른 하늘이 가슴 가득 안겨옵니다. 화살을 힘 있게 튕겨냅니다. 과녁에서 한참 벗어났지만 꽁지깃까지 힘이 빳빳하게 들어가 있었다.
“한결 낫구나.”
오늘 처음으로 할아버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이 걸렸습니다. 건이는 다시 화살 한 대를 시위에 걸었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서 속삭이듯 조그만 떨림이 전해옵니다. 그 떨림이 점차 퍼져나가 꼭 몸 전체가 커다란 활이 된 느낌입니다. 건이는 그 기분 좋은 떨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망설임 없이 시위를 놓았습니다
퉁-.
소리 없는 울림이 활터를 가득 메웁니다. 햇살을 등에 지고 바람의 힘을 빌은 화살이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하늘을 헤엄쳐 갔습니다. 등이 파랗게 빛나는 날렵한 물고기였습니다.
‘아! 이 느낌!’
오랫동안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건이는 눈을 감고 탁 트인 한숨을 내뱉습니다.
“하!”
몸 안에서 무언가 함께 튕겨나가는 기분. 온 몸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처럼 자유로운 기분입니다.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처음 들이킨 공기의 시원함처럼 머릿속까지 상쾌해 집니다.
“좋구나!”
할아버지는 그제야 주름살이 굵은 입가에 확실한 웃음을 띠었습니다.
“할아버지!”
“?”
“제 활에서 물고기가 살아났어요.”
할아버지와 건이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빙긋 웃음을 지었습니다. 날아갈 듯 경쾌하게 말려 올라간 기와 지붕 위로 조금씩 붉은 저녁놀이 비쳐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