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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④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국가를 경영하다

세종의 자주·애민·과학정신 늘 새로워
세계사적 위업…여론조사 후 정책추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적어도 한국 사람으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한글, 곧 우리글을 만들고, 지금 우리가 국경이라고 말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의 영토를 확정했다는 사실 정도다. 그런데 세종이 이승을 떠난 지 500년하고도 쉰여덟 해가 되고, 태어난 해로 따지면 올해가 611돌이 되는데도,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빛나는 것은 왜일까?

믿음과 형평성의 원칙 강조
세종은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잠시라도 팔짱을 끼고 한가히 앉아 있는 일이 없이, 백성 위에 있으면서도 백성보다 더 백성과 함께 살고자 나날이 정사를 보살피고, 여가에는 학문과 궁리, 창조와 경륜에 마음을 쏟았다. 또 중국의 입김이 거센 가운데에서도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독립국가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었다. 시황제나 나폴레옹처럼 영웅적 권세를 누리기보다는 머나 먼 국경지방의 민관의 생각까지 하나 놓치지 않고 물어서 세금의 형평을 논하기도 했고, 하늘의 별을 관측하고 강우량 측정기를 만들어 농사일에 보탬을 주고, 시계를 만들어 백성이 시간을 알게 하는 세심함에까지 열을 쏟았던 임금이었다.

죄인을 다스릴 때도 등을 때리는 법을 폐지하고, 죄수들의 옥중 생활에 조금이라도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여름에는 바람이 통하게 하고 햇빛을 막아 주었고, 겨울에는 따뜻한 감옥을 만들게 하였으며, 다만 죄수들이 도망을 가지 못하게만 하였다.

이러한 세심한 노력은 임금의 권능으로만 치부하고 간과해 버리기 쉬운 인간적 고뇌(형제간의 우애, 외가와 처가 문제 따위)를 삭이며 철저한 믿음과 형평성 원칙을 가지고 통치한 균형감각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중국 또는 이웃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남의 옷을 받아 그대로 입기보다는 새로 본을 뜨고 자로 내 몸을 재서 우리 새 옷감으로 꼭 맞게 만들어 입는 방법을 찾는데 힘썼다.

“우리는 중국과 다르다”
세종이 이토록 백성을 위하고 올바른 정치를 위하여 몸부림친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모름지기 그것은 나라가 흥망성쇠 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새로운 국가를 개국함에 있어 광명정대한 다스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이 함께 편안히 살 수 있는 해결책을 강구한 데에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태조 이성계 때부터 깊이 있게 논의되었겠지만, 사반세기가 지난 세종 때에 와서야 실현된 것이다.

집현전만 하더라도 고려 때 생겨 이름만 유지하다가 조선 초 정종 때 그 기능이 회복될 듯하더니, 역시 제 구실을 못하였다. 세종은 즉위 직후 1420년(세종 2년)에 집현전을 확충, 대궐 안에 설치하여 학자를 우대하고, 학문을 숭상하여, 역사·천문·지리·정치·도덕·예의·문자·운학·문학·종교·군사·농사·의약·음악 등에 관한 각종 저서를 짓게 하였다. 이러한 저술된 책들은 다 우리나라 600여 년에 가까운 문화생활에 막중한 지침서적 공헌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무원한 미래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한글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이 부족한 후손들 때문에 500년 동안에 한글이 빛을 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도 세종 이후의 역대 임금과 신하와 모든 백성들이 지금보다도 더 입이 닳도록 세종의 인품을 칭송하고, 오늘날 세계 석학들도 한글 창제 업적 하나만 놓고도 극찬하고 부러워하고 있다.

현대사에서 우리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링컨의 민주주의 정신을 양대 산맥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 보다도 더 우리 겨레의 역량 속에 면면히 흐르는 세종의 민본정신야말로 후대에 시대적 요구에 따라 늘 새롭게 대두되어 조명되고 있는 불멸의 정신이다. 예를 들어 한글은 창제 당시 ‘우리는 중국과 다르다’는 자주정신과 모든 백성이 앎을 향유하도록 애쓴 민주정신으로 탄생하여, 일제 36년의 압박 속에서 자주 독립의 구심체가 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우리 문화 발전의 최상의 도구로서 쓰이고 있다.



여론조사로 백성의 뜻 반영
세종의 업적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다. 전제를 개혁하고, 세제를 정리하며 도량형기를 바르게 고쳐서 사용하게 함으로써 국가 경제 생활의 건전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인재를 뽑아 쓰되, 적재적소의 일을 시켜 금속활자를 개발하고, 국악을 정비하고, 천체관측기인 혼천의·간의·일성정시의, 강우량기인 측우기, 하천 수량을 재는 수표,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해시계인 앙부일구·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 절기를 정하는데 쓰는 규표 등을 발명 제작함으로써 세계 과학사에 있어서 15세기는 세종의 과학시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글과 측우기 및 측후법의 창시는 세계 최초 최선의 자랑이요, 인쇄활자와 국악은 문명사적 자랑이다.

이러한 자랑할 만한 수많은 업적 가운데서도 현 민주주의시대에 사는 우리로서 특별히 우리 피부에까지 파고드는 것이 있으니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꽃인 국민투표와 같은 세계 최초의 여론조사이다.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답사 고찰할 때에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민을 괴롭히고 있어, 내 심히 우려하고 있다. 각도에서 여론을 조사하여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면 그 공법(세법)의 편리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따위의 일을 백관들은 깊이 의논하여 아뢰라”하여, 공법(貢法)을 제정하면서 좋다고 하는 사람이 9만8657명이고, 좋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7만4149명으로 나타나 결정지었다.

또 죄인이라도 15세 미만인 어린이와 70세가 넘는 늙은이는 살인죄와 강도죄가 아니면 옥에 가두지 못하게 하고, 80세 이상 10세 이하는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어도 구속하거나 고문하지 못하게 하며, 재판 때에는 사죄삼복계(死罪三覆啓)의 법을 실시하게 하며, 시체를 검시함으로써 형벌을 공정하게 하였고, 공처노비 가운데 임신한 여인에게는 아이를 낳을 달과 출산 후 100일 동안의 산아휴가를 주었다. 대마도를 정벌할 때도 “군사를 일으키는 뜻은 살생이 아니다”라는 말로 어루만지는 데에 그쳤고, 야인을 토벌할 때도 “토벌이란 정의로서 불의를 목 베이는 것”라는 말로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명황계감’을 지어 좌우명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후세 제왕의 일락을 방지하고, ‘자치통감훈의’와 ‘치평요람’을 편찬하여 흥망성쇠를 본받도록 하였으며, ‘역대병요’를 통해 전쟁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세종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자기의 몸도 돌보지 않은 분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함을 극진히 하였고, 형제간의 우애는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으며, 부부의 정도 두터우셨으니, 모든 다스림에 스스로 본보기가 된 점들은 위정자의 본보기, 어른의 본보기, 스승의 본보기로 충분하다.

결국 한글 창제라는 작은 틈으로 바라보는 세종의 위대함은, 그런 위업을 이루기까지의 자세와 그 위대한 정신(특히 자주·애민·과학정신), 그리고 그 치밀한 계획과 불굴의 의지,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태도가 견고하게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 역사상에서 그 위대함이 우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세종대왕 즉위 590돌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돌이 되는 해를 기리며, 세종대왕을 겨레의 큰 스승으로 그분의 공덕과 위업을 우리의 지표로 삼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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