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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⑤ 知行의 길 실천한 의지의 여인-신사임당

우리 역사 속 인물을 보면 남성 위주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자신의 책무를 게을리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사회적 활동을 제한당하면서 그 역할의 폭이 가정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사임당 역시 모범적인 어머니이자 아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신사임당은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개발해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킨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시·그림·서예 등 다양한 재능 뽐낸 종합예술인
권력 재편의 혼란기 속에서 더욱 빛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어진 어머니로는 신라시대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이나 고려시대 정몽주의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부모에 효도한 여성은 신라시대 지은을 비롯하여 문화의 유씨 등 수없이 많다. 또한 학문이 높고 시문에 능한 부인은 고려시대 여옥을 위시하여 윤지당 임씨 등이 있었으며 글씨를 잘 쓴 부인은 익제 이제현의 손녀 이씨와 강희안의 따님 강씨가 있었고 그림 잘 그리기로는 강희맹의 후손 월성 김씨, 육오재 정경흠의 누이 정씨 등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부인들은 각각 한두 가지의 재주와 성품을 가졌을 뿐이요, 더구나 그 유품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뛰어난 인격자요, 덕 높고 어진 어머니이면서 어버이에게 지극한 효행을 실천한 효녀이고, 학문이 깊으며 시문과 그림, 글씨, 자수에까지 능한 종합적인 모범여성이다. 오늘날 신사임당의의 많은 유품들이 국가와 지방의 문화재로 전승되어 보존하고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요 우리에게는 큰 행운이다.

뚜렷한 주관 갖춘 가정 CEO
신사임당은 서기 1504년(연산군 4년) 음력 10월 29일에 지금의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 오죽헌에서 아버지 신명화공과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명화공은 당시 영월군수인 신숙권의 아들로 뒷날 기묘명현으로 알려진 덕망 높은 선비였으며 어머니 용인 이씨는 세종 때 예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의 외손녀요, 아버지는 생원 이사온이었다. 특히 용인 이씨는 중종 때 열녀와 효부의 정려를 받았으니 참으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신사임당이 태어나 살다간 시대를 돌아봐야 한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해가 바로 저 유명한 갑자사화가 있었던 해이다. 조선은 1498년 무오년을 시작으로 갖가지 사화가 1545년까지 57년간을 이어졌다. 1551년에 세상을 떠난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가운데에도 권력 재편으로 가장 혼란과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를 살았다.

이렇게 당시 조선사회는 남자들도 학문과 경세에 새로운 가치관으로 방황을 하며 몸을 사리고 좌고우면(左顧右眄)하던 시기였음에도 신사임당은 그 시대에 여인의 몸으로 학문을 익혀 율곡 이이 형제의 학문의 기본을 세웠고, 글씨와 그림을 익혀 재능을 발휘하고 예술의 창작품을 남겼으니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강한 의지와 독창력을 가진 여인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신사임당이 재능을 발휘하고 학문을 익히도록 배려를 하고 여건을 갖추어 준 친정어머니 용인 이씨와 외조부 최응현의 앞선 생각은 아무리 좋은 재목이라도 다듬는 목수가 우수하지 않으면 제구실을 못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증명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신사임당은 흔히 말하는 사대부집 요조숙녀의 현모양처였다기보다 미래의 희망을 간직하고 목표를 향해 뚜렷한 소신으로 어려운 가정형편에 착하기는 하되 유약한 남편을 섬기면서 7남매를 하나같이 어질게 성장시키고, 매사를 몸소 실천하여 지행(知行)의 길을 살아온 의지의 여인이라 할 것이다.

그러기에 50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신사임당을 겨레의 어머니로, 이 시대에도 본받고 따라야 할 여인으로 추앙하는 것이다. 특히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모자가 함께 화폐의 인물로 선정된 것이 자랑스럽다.

실천 강조한 자녀교육 6계명
신사임당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다음의 6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효행이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가르치며 몸소 실천하였음은 물론, 가르침을 받은 것은 반드시 행실로써 실행하도록 했다. 또 효는 자신의 생명의 근원과 인격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한 점 망설임 없이 행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 형제간의 우애다. ‘형우(兄友) 제공(弟恭)하면 이이(怡怡)하리라’, 즉 ‘형된 자가 아우를 우애로써 대하고, 아우된 자는 형을 공손하게 대하면 즐겁고 기쁨이 넘칠 것이다’라고 했다. 또 ‘한 가족이 감화되지 않으면 필시 내 성의가 부족한 때문이라 생각하여 더욱 정성을 다해야한다(一家之人不化只是誠意未盡)’고 강조하고, 형제간에 서로 어려움이 있을 때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 하며 함께 사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음으로 입지(立志)를 중요시했다. 신사임당은 자녀들에게 ‘뜻을 품은 자는 이루지 못 할 일이 없다’고 가르쳤고, ‘모든 일은 뜻을 세우는데서 부터 시작된다’하여 ‘뜻이 있는 사람에게만이 학문이 탄생되고 덕이 탄생되고 공(功)이 탄생된다’고 가르쳤으니 뒷날 율곡 선생은 격몽요결이나 학교모범, 자경문 등 모든 저서의 첫머리에 입지를 강조했다.

넷째 예경(禮敬)이다. 부부간에 서로 예로써 대하고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만약 신사임당이 자신보다 학문이 낮고 경제력도 어려운 남편에게 교만한 몸가짐으로 박대했다면 지금 같은 평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가 공직에 있을 때 수많은 조언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소신 있고 명철한 아내이기도 했다.

다섯 째 성실(誠實)과 신의(信義)를 가르쳤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도와준다고 했다. 세상을 더불어 살면서 서로 간에 진실됨이 부족하고 믿음이 없으면 불신과 배척을 당하여 자신과 이웃 모두에게 불행을 주게 된다고 했다. 성실과 진실로 살아가면 반드시 이웃의 신임을 얻어 보답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성실과 신의는 곧 남을 위함이 아니요, 자신을 위하는 덕목이다. 율곡 선생은 어머니의 감화로 후학들에게 ‘사사경(事思敬)’을 가르쳤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그 일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라는 신의, 성실의 본보기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귀히 여기도록 했다. 신사임당은 자녀들에게 ‘山不在高(산불재고) 有仙則名(유선칙명)/水不在深(수불재심) 有龍則靈(유룡칙령)’을 즐겨 가르쳤다. 이는 중국 시 ‘누실명’의 첫 구절로 ‘산이 높아서 명산이 아니요, 그 산속에 신선이 살고 있으면 그 곳이 명산이요, 물이 깊어서 영험한 것이 아니라 그 물에 용이 살면 영험한 것’이라는 뜻이다. 스스로가 용이 되고 신선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 선생 같은 대현을 기르려면 어머니가 먼저 신사임당의 생애를 살아야 할 것이요, 훌륭한 인재를 원하면 스승이 스승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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