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학기술부가 논란이 된 고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해 30일 수정권고안을 발표하면서 가장 강조한 것은 교과서 내용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저해했는지 여부, 고등학교 학생수준에 적합한지 여부 등 크게 두 가지다.
근현대사에 대한 해석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교과서는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모범답안'과 같은 것인 만큼 국가의 정통성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담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과부는 이 기준을 토대로 현행 6종의 근현대사 교과서 내용 가운데 50개 표현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같은 내용을 담은 수정권고안을 출판사 및 집필진에게 전달할 계획이어서 최종 수정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수정권고안 주요 내용은 = 교과부가 교과서 수정 작업에 착수한 이후 뉴라이트 계열의 지식인 모임인 교과서포럼, 통일부, 국방부 등 각 보수단체와 정부부처로부터 취합된 수정요구는 모두 253건이었다.
이 중 크게 쟁점이 되지 않는 102건에 대해서는 집필진이 자체적으로 수정하겠다는 뜻을 밝혀왔으며 나머지 151건 가운데 55건에 대해서만 직접 집필진에게 수정을 권고하겠다는 것이 교과부 설명이다.
집필진이 자체 수정의견을 밝힌 102건은 주로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폄하한 부분, 남북관계를 평화통일이라는 한가지 잣대로만 서술한 부분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부가 직접 수정을 권고한 55건은 수정요구 건수를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중복된 요구사항을 제외하면 교과서 내용상으로는 총 50개 표현에 대한 것이다.
특히 ▲8ㆍ15 광복과 연합군의 승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부분 ▲미ㆍ소 군정과 관련해 서로 성격이 다른 사료를 비교, 학습자를 오도한 부분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전가한 부분 ▲대한민국을 민족정신의 토대에서 출발하지 못한 국가로 기술한 부분 ▲북한정권의 실상과 판이하게 달리 서술한 부분 등이 대표적이다.
'좌편향'의 대표적 내용으로 지적된 금성교과서의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장애가 되었다…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은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는 부분은 분단의 원인을 왜곡할 수 있는 내용이므로 삭제 또는 수정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남한에서 정부가 세워진다면 이는 북한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였다. 이제 남과 북은 분단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금성 261쪽),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1948년 5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금성 262쪽) 등의 표현도 정부수립의 의의, 정통성을 저해할 수 있으므로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북한 정권에 대해 우호적 서술을 했다고 지적됐던 부분, 객관적 근거가 불충분한 표현 등 역시 수정권고안에 포함됐다.
통일에 대한 남북 간 시각차에 대해 서술한 금성 교과서 316쪽 내용에 대해서는 "북한의 실상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서술"이라며 보완하라고 지적했으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상황을 다룬 중앙교육진흥연구원의 교과서 323~337쪽 내용에 대해선 급변하는 남북한 관계의 변화를 고려해 최근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새마을 운동은 겉으로는 민간의 자발적인 운동이었으나 실제로는 정부가 주도하였다. 그 결과 박정희 정부의 독재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금성 334쪽) 등의 표현은 전 정권에 대한 편향적 시각이 담긴 기술로 지적됐다.
◇ 좌편향 논란 해소될까 = 교과부는 이번 권고안을 6개 출판사와 각 집필진에게 전달해 권고 내용이 내년 3월 각 학교에 배포될 새 교과서에 반영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검정 교과서 체제에서 교과서 수정에 대한 최종 권한은 집필진에게 있기 때문에 교과부의 권고 내용을 집필진이 얼마나 수용할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교과부는 그러나 문제가 된 표현이 담긴 부분을 교과서에서 아예 통째로 들어내거나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내용을 수정, 보완하라는 차원인 만큼 집필진 역시 큰 반발 없이 동의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교과부 심은석 학교정책국장은 "강제적인 방법의 수정요구는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집필진을 최대한 설득해서 교육적 방법으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수정권고를 계기로 좌편향 교과서 논란이 어느 정도 해소될지 여부도 관심거리다.
일각에서는 교과부가 제시한 수정의견 중 상당수가 단순히 불필요한 수식어 표현에 대한 지적, 일부 단어의 삭제 또는 보완 등을 요구한 수준에 그치고 있어 당초 기대했던 수준에 비해 크게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대폭적인 교과서 수정, 더 나아가 좌편향 교과서 폐기 주장까지 폈던 일부 보수단체로서는 이번 수정 권고안 자체에 대해 정부의 교과서 수정의지가 퇴색했다고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교과부는 그러나 교육과정이 새롭게 바뀌는 만큼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논쟁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2월 고시된 새 교육과정 개정안에 따라 2011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의 국사, 세계사 과목이 역사 과목으로 통합되고 2012년부터는 한국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없어지는 대신 한국 문화사, 동아시아 등 새로운 선택 과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한국 근현대사 과목이 없어지는 만큼 근현대사 관련 서술이 지금보다는 훨씬 축소될 것이며 따라서 근현대사를 둘러싼 이념 논쟁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